9월8일 제자들의 두려움(2)

조회 수 1815 추천 수 11 2008.09.07 22:45:09
2008년 9월8일 제자들의 두려움(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어제의 묵상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은 신앙의 토대입니다. 구약성서에도 이런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모세의 호렙산 경험이 가장 전형적인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산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신적 존재를 경험하고 신발을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집트 파라오의 병거와 마병들을 홍해에서 궤멸시킬 것을 본 이스라엘도 야훼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이집트의 군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야훼가 바로 그 대상이 되었습니다. 야훼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은 이집트 군대의 폭력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신앙은 이런 거룩한 두려움을 상실했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종교적 유희가 지배할 뿐입니다. 어린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과자를 얻어먹는 태도와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궁극적인 생명의 심층에 들어간 사람들이 그 생명의 주인에게 드리는 예배마저도 자신들을 위한 엔터테인먼트가 되고 말았습니다. ‘열린예배’가 각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런 현상에 대한 단적인 예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 할 수 있지요.
한국교회에 왜곡된 두려움이 있기는 합니다. 그것은 징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심층적인 만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단지 자기에 대한 과민한 반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지옥에 갈까 하여, 사업이 망할까 하여, 자식들의 출셋길이 막힐까 하여,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생명의 신비도 만날 수 없으며, 당연히 평화와 자유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 한국교회와 우리 자신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영적 두려움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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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08.09.08 09:06:23

목사님,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를 자유와 평화로 인도해 주는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책감에 사로잡힌 두려움은 불안과, 초조,눌림등의 현상으로 나타나겠지요.
'진리와 성령으로의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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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08 15:50:41

클라라 님이 거룩한 두려움의 개념을 분명하게 파악했군요.
그걸 알기만 하면
이제 다비아에서 더 이상 읽을 게 없어요.
다비아를 떠나서
자기의 길을 가도 됩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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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08.09.08 21:22:36

목사님,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어쩌다 소 뒷걸음질 치다 뭐 밟았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배에 대한 생각을 골똘히 하다 보니 익숙한 성경 말씀이
문득 떠 올라서 말씀 드렸던 것 뿐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얼마나 곡해 하고 있는지,
정말 예배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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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2008.09.08 21:45:44

정 목사님!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들의 행위를 뛰어넘는다"는 것에는 토를 달 수 없지만
그것을 단절이라는 표현으로 말해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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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08 21:58:39

모래알 님,
위의 인용문은 어디서 온 거에요?
단절이라는 단어를는 제 꼭지글에 있는 게 아닌 것 같군요.
그래도 그런 뉘앙스의 글은 제 글에 넘처나니, 큰 문제는 아니에요.
하나님은 절대타자라는 뜻으로 제가 그런 말을 했을 것 같군요.
그건 접어두고,
단적으로만 말하면 이렇습니다.
1억년 전의 지구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실래요?
그건 예측이 안 될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와 단절된 거지요.
1억년 후에 지구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예측할 수 있을까요?
대빙하기가 오지는 않을까요?
그걸 예측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타자입니다.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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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2008.09.08 22:14:42

목사님! 어제 매일 묵상에서입니다. 어제 쓰신 글을 오늘 읽었습니다. ㅎㅎ

절대타자의 의미에 대해서 이해는 하고 있지만
나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님이라는 개념과 자꾸 부딛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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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08 22:45:35

성령이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절대타자로 경험한다는 것은
전혀 대립적이지 않습니다.
절대타자로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보면 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에 앞서 생각해야 할 것은
성령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성령은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화염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일상 안에서 일상 너머로 나가야 하고,
그 성령 안에서 일치와 단절을 동시에 맛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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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2008.09.08 23:10:18

일상 안에서 일상 너머로 나가는 거 정말 힘든 일인 듯 싶습니다.
성령 안에서 일치와 단절을 맛보기까지..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차분히 지나간 글들을 읽을 수 있는 멋진 아침입니다.
좋은 밤 되십시요.

[레벨:4]알고파

2008.09.09 11:51:52

절대타자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가 아닐까요?
삼위일체를 본질이나 위격 등으로 어렵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절대타자인 하나님이 역사적인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고
절대타자인 하나님이 영으로 인간과 연합하시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우리를 끌고 가는 그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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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8.09.09 12:07:04

목사님, 성령은 우리가 접근할수 없는 화염이다고 하셨네요...
이 말씀이 무얼 의미 하는것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군요.
요14장26절에,
예수님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고 하셨고,
고전 3장16절에서 바울선생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하면서,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소통자,
또는 우리 심령속에 내주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말하고 있는것 같은데요,
목사님은 성령은 우리가 접근할수 없는 화염이라고 하시니 예수님과,바울선생이 말하신 성령과
목사님이 말하시는 성령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것 같은데요?
많이 혼동 되어지는 말씀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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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10 23:38:59

성령은 화염이라는 표현은
성령의 속성에 대한 일부를 말하는 거에요.
성령은 우리가 완전하게 규정할 수 없는 생명의 영이랍니다.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갈 뿐이지
우리가 그를 볼 수는 없어요.
마치 하나님이 두려움이면 사랑인 것처럼이요.
성령과 소통해 봤어요?
예수님과 바울의 성령에 대한 진술도
모든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오해는 마세요.
내 생각이 예수님과 상대할 수 있다는 게 결코 아니랍니다.
저는 그분을 믿을 뿐이지요.
바울을 상대할 자신이 없어요.
그분에게서 배울 뿐이지요.
성령은 열린 영이랍니다.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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