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5일 ‘어록’5-3

조회 수 1673 추천 수 2 2008.06.14 23:16:38
2008년 6월15일 ‘어록’5-3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오늘 묵상의 말머리로 삼아야겠습니다. “심판당한 분을 심판자로 믿으니 말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이 저의 독창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어디서 읽은 게 무의식적으로 기억이 난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심판 당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그가 당시 종교의 최고 권위인 가야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심문을 받았으며, 정치의 최고 권위인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았다는 명시적 사실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사람들이 심문했다는 사실이 괴이쩍어 보이겠지만, 당시로서는 그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종교재판을 받았듯이 예수님도 그런 방식으로 재판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심판을 당했다는 것은 이 세상이 하늘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질서만을 진리로 알고 있는 한 그것을 뛰어넘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한 자이며, 세상의 질서를 훼방하는 자입니다. 모세의 법과 로마의 법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배척받은 예수님을 이제 거꾸로 세상의 심판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무슨 근거로 이렇게 믿었을까요? 예수님이 세상의 심판자라는 말은 이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질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그걸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 생명의 세계가 곧 부활입니다.

[레벨:0]보아스

2008.06.15 14:57:17

세상의 법과 로마의 법, 그리고 모든 종교의 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모세의 법이 그리스도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다고 하는 표현은 성경 계시의 일관성이라는 점에서 조금 수정이 되 었으면 좋겠네요,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완전케 하러 오신 것으로서, 사실은 율법 자체도 하나님 나라를 계시해 주는 말씀으로서 , 단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라는 종교인들에 의해서 율법의 의미가 왜곡되었던 것을 예수님께서 그 본래의 의미를 드러내시고 선언하신 것이, 곧 산상수훈으로서,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들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할 새로운 질서에 대한 선언이며, 어쩌면 오히려 예수님은 이처럼 모세의 법, 즉 율법의 본질적인 의미를 밝히시고 가르치신 일 때문에 배척을 당하신 것이 아닐까요?
정목사님께서 옥한흠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하신 글에서 옥목사님의 설교가 목음적이라는 사실만은 크게 사셨습니다만, 거기서 옥목사님이 복음의 시대란 곧 옛 언약의 시대에서 새 언약의 시대로 온 것이라고 하면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시대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시대가 곧 복음의 시대라고 하는 설교는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도 바울의 가장 기본적인 설명(롬 4:3)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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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6.15 16:10:16

클라라 님,
예수, 생명, 하나님의 나라를 연결해서 생각하시는군요.
그런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사유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씩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겠지요.
보편적인 생명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는가, 하는 질문이
기독교 신앙의 요지라 할 수 있겠지요.
한편으로 막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설레이지요.
좋은 주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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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6.15 16:31:06

보아스 님,
안녕하세요?
두 가지를 말씀하셨군요.

1.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마태 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만 이해될 수 있지 않을는지요.
그건 곧 율법을 거부할 수 없는 마태 공동체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이 문제는 보다 까다로운 역사비평 작업을 거쳐야 하니, 접어두는 게 좋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이 부분적으로 왜곡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보완관계로 보면 곤란하지 않을는지요.
율법은 기본적으로 업적의이고,
복음은 이신칭의니까요.
예수님과 복음은 왜곡된 복음의 본질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을 제시하는 거라고 보아야겠지요.
율법에 의하면 세리와 죄인은 결코 구원의 가능성이 없지만
복음에 의하면 오히려 그들에게 구원이 더 가까운 것처럼이요.
율법(행위, 도덕, 윤리, 조직, 제도 등등)이 무조건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상대화되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의 성취가 아니라
회심(메타노이아)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2.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바울의 진술은
복음의 진수를 정확하게 설명한 겁니다.
그런데 보아스 님은 어떤 뜻으로 옥 목사님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보시는지요?
아브라함은 할례와 행위가 아니라, 즉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지요?
그게 바로 율법을 완성한다는 말씀인가요?
이런 문제에 관해서 저에게 조금 더 설명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보아스 님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투쟁했던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의 입장과 비슷해 보이는군요.
주의 은총이.

[레벨:0]보아스

2008.06.15 18:48:49

정목사님, 즉각 댓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목사님의 글들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만, 제 글에 대한 정목사님의 지적을 보니까 아무래도 성경 해석에 관한 신학적인 차이가 큰 것이 많은 이견의 이유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현대신학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고, 역사비평적인 신학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지 않습니다. 다만 목회 현장에서 오랫동안 말씀을 연구하면서 나름대로 성경을 보게 된 관점이 있다면 구속사적인 성경 해석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구속사적 성경 해석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구약이나 신약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단번에 이루시는 십자가 구속사역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 일관된 원리라는 것이 아마도 이 입장에서 취하는 가장 중요한 견해일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이나 아벨이나 모두 이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도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시대는 없었다는 것이 또한 이 입장에서의 관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옥목사님이 설교에서 말했듯이(정목사님께서 그렇게 인용을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는 옛 언약의 시대로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던 시대이고, 신약 시대는 새 언약의 시대로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복음의 시대”라고 하는 말은-표현이 잘못 되어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일관된 구원 원리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지적을 했던 것입니다. 아마 이런 지적도 정목사님이 견지하는 신학적 입장에서는 수용하기가 어려운 관점이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초대교회의 유대주의적-기독교인들의 주장과 동일하지 않느냐는 지적은, 율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서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판단인 것 같습니다. 초대 유대-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지킬 것을 주장을 했는데, 그들이 주로 지켜야 한다고 한 율법은 소위 할례나 절기, 음식 예법 등의 의식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법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구원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므로 사도들은 이런 의식적 율법을 지킬 것을 주장하는 유대-기독교인들과 대립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면 율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율법은 복음과 대립적인가 아니면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는가 하는 데에 대해서는 이 또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은 대략 제사법이나 절기, 정결 예법, 음식 규례 등의 ‘의식법’과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으로 구분되는 가운데, 의식법들은 한 마디로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구원을 보여주기 위한 모형으로의 기능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의식법들을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등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다 성취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위시한 도덕법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내야 할 삶의 가인드 라인 또는 규준으로서, 이 도덕법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종교적 전통에 의해서 이 도덕법들을 적당한 수준으로 약화시키거나 변질시킨 가르침들이 많았는데, 그것을 새롭게 율법의 본질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해설해 주신 것이 산상수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모든 율법(도덕법)의 완성을 사랑으로 해석하시면서 개개의 계명들의 본질적인 의미, 즉 하나님께서 그 계명들을 주신 뜻을 재천명해 주셨으며 또 몸소 그렇게 사셨는데,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또한 율법을 완전케 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율법의 온전한 의미가 드러나게 되더라도 우리 인간들은 그것들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기초로 성령을 믿는 자들에게 보내주심으로써,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사는 자들이 율법의 근본적인 요구들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셨는데(롬 8:1-3), 이런 면에서도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신 분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옛 언약(구약)과 새 언약(신약)의 시대의 차이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시대와 안 지켜도 되는 시대의 차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시대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시대라는 점에서 그 차이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겔 36:24-27; 렘 31:31-34). 만약 도덕법으로서의 율법마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곧 율법폐기론이 되고 맙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런 율법폐기론자 또한 사도들과 성도들이 싸워야 하는 대상이었음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정도의 설명은 오랫동안 신학연구를 하신 정목사님께는 대단히 초보적인 이야기에 불과하겠지만, 이 초보적인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 마디로 제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율법(도덕법)의 온전한 이해와 순종을 통해서 살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율법의 수행마저도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이런 저의 주장이 유대주의적-기독교와 흡사하다고 하시면 더 이상 함께 나눌 말이 없겠지요.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길을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시는데,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말씀 강해를 들은 그 두 제자는 그들의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곧바로 죽음이 두려워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발걸음을 되돌이켜, 죽음의 위험과 예수를 죽인 세상의 세력들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인 격 속에 진정한 의미의 부활 체험이 일어난 것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나야 할 영적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께 모세(율법)와 선지자의 글, 즉 구약성경을 자신의 구속 사역과 관련해서 말씀을 풀어주신 것이 곧 구속사적 성경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정목사님의 설교 사역을 통해서 이 땅의 수많은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이 뜨겁게 되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레벨:4]알고파

2008.06.16 18:09:35

왜 인간들은 자기의 구원의 커트라인에 관심이 많을까요?
그것도 너무 자기중심적인 것은 아닌가요?
물론 자신이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지만...
우리가 그렇게 커트라인을 걱정할 정도로 예수님이 구원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안된다는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이겠지요.
믿는다는 심리적 상태가 아닌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참여는 우리 존재를 거는 것이니까 상당한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음과 행위를 마치 마음과 행동 식으로 나누는 것은
고대인의 머리에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새로운 존재에 참여하면 행위가 따라나오겠지요.
믿기는 하는데 우리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제대로 믿는 것인지 자신을 돌아봐야겠지요.
다만 우리의 행위를 결의론식으로 세세히 따져서 구원과 결부시키지는 말자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레벨:2]한결

2008.06.16 20:05:57

율법의 완성은 언약의 기반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의로움을 억는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언약 공동체에 포함이 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으니까요.
언약 백성이 됨으로 새로운 생명, 부활 생명이 완전히 드러나는 날 율법을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겠지요. 미래에 이뤄질 그 사건을 오늘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성령의 도우심이고요.

율법의 완성에, 그것도 의식법과 도덕법의 완성에 촛점을 맞춘다면 언약 공동체에 일원이 됨으로 경험하는 새로운 생명 세계, 차원이 다른 세계로의 참여가 갖는 그 풍요로움을 놓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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