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6일, 화
바람과 불
앞 주일 설교 성경 본문인 마 3:11절에 예수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는 말이 나온다. 성령은 헬라어 프뉴마의 번역이고 그 뜻이 무엇인지를 설교 시간에 설명했다. 바람(영)과 불은 고대인들에게 생명의 능력이었다. 이건 물리학적으로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만약 지구에 바람과 불이 없다면 생명 현상은 불가능하다. 고대인들은 지구의 물리 현상을 몸으로 느끼면서 살았지만 오늘 현대인들은 그것을 소외시키고 있다. 인간 자신이 소외당하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겪는 어려움은 성경이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바람과 불도 같은 이야기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순전히 물리적 현상으로 보고 있지만 고대인들은 물리 현상을 뛰어넘어 신적인 힘으로 인식했다. 현대인들의 물리적 지식을 우월한 것으로 전제한다면 고대인들의 저런 세계관은 유치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 기독교인들은 양 극단으로 떨어지곤 한다. 하나는 성경에 나오는 유치한 세계관을 문자의 차원에서 그대로 고집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양 극단을 극복하는 길은 자연신학, 또는 과학신학의 회복이다.
한국교회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에만 치우침으로써 자연신학이 들어설 공간을 축소시켜버렸다. 자연신학은 단순히 자연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거나 자연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놀라워하는 것만이 아니다. 자연의 원리이자 속성인 물리 현상을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작업까지 포함된다. 과학철학과의 대화도 필수다. 세상의 모든 것, 즉 바람과 불과 햇살과 색깔과 흙과 물과 공기 등등,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 궁극적으로 신비다. 신비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니 그걸 해명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니
만물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