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4일 부활이 뭐꼬?

조회 수 1768 추천 수 14 2008.07.13 23:13:00
2008년 7월14일 부활이 뭐꼬?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막 9:10)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비밀로 부치라는 9절 말씀에 이어서 마가복음 기자는 10절에서 제자들이 그것을 궁금하게 생각했다고 보도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세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다니, 그것이 실제로 무엇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의 실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혹 죽어서 천당을 경험하고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사림이 있는데, 그런 주장은 신빙성이 없으니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런 주장은 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데서 나옵니다. 죽는다는 것은 현재의 생물학적인 몸으로 돌아올 수 없는 상태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성서는 분명히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진술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신앙이 아직 정착되기 이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의 부활 신앙이 한 순간에 완성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신앙에 이르는 어떤 과정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부활 현현을 경험한 그 순간은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부활인지를 인식하게 된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과정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질문은 오늘도 역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무조건 믿고 싶겠지만, 그게 바로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열린 진리가 아니라 닫힌 도그마에 빠지게 하는 유혹입니다. 부활은 바로 종말에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궁극적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뭐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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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2008.07.15 13:34:16

요즘 사랑채에서 열띤 토론이 되고 있는 논점 중 하나가 기독교진리를 단정화시켜 믿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부활, 생명, 영생, 죽음, 종말 어떤 것 하나 우리가 단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정직한 질문을 할때
우리는 정직한 답변으로 수용가능 하다고 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신앙의 열린자세로 끊임없이 신앙의 깊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자기 자신의 신앙에 집착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도 자유하는 영의 힘으로
이 무더운 여름의 한 줄기 소나기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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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8.07.15 14:46:14

주님의 제자들이 본것,경험한것, 체험한것,
또한 신앙의 선진 교부들이 성서와,하나님과의 깊은 내면 구도의 영성속에서
빚어낸 기독교의 본 바탕이 때로는 단순하고,진부하고,매일 듣는 소리갔지만
참 진리는 그 속에 들어있는것 아닐까요?
매일 먹는 밥이 싫다고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본것,체험한것,
교부들이 실질적으로 깨달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거론하는 것이
과연 자기의 신앙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정 목사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 베토벤이나,모차르트의 세계를 인용하시는데요
저도 인용 한번 합니다.
21세기 첨단 문화와 과학속에서도 불세출의 이런 명곡과 영웅들은 두번다시
나오질 않겠죠?
여기에 저는 영성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첨단 과학과, 학문과,문화로 모든 것을 불편하지 않게 얻을수는 있겠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첨단 과학과,인문학등으로 과연
주님의 제자들이 성서를 통해서 남긴 발자취,그들이 경험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
그들이 성서를 통해서 계시한,
생명,부활,영원한 세계를 과연 제자들이나,교부들과 같이 이해할수 있을까요?

이미 아리아 밤의여왕은 주님의 제자들과, 교부들은 경험하지 않았을까요?
그 세계를 깊이 경험하였겠죠..
그걸 제자들은 성서에 기록한것이구요.. 교부들도 교리로 나타낸 것이구요..
전 지금 충분히 밤의여왕을 제자들의 기록을 통해서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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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3일 초막 셋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 9:4) 천상의 세계를 경험한 베드로는 그곳에 세 채의 초막을 짓겠다고 제언합니다. 그 세 채는 물론 예수님, 엘리야, 모세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발상이 조금 유치해 보이긴 하지만 나름으로 신학적 의미가 있긴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푸른 나무 가지로 만든 초막에서 지내야 했으며(느헤미야 8:14,15),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 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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