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8절은 좀 심각한 내용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읽힐 수 있는 사건들이 적지 않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모세도, 여러 선지자들도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거나 보았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적인 수사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가 없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을 본다는 것, 즉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생명이 무언지 모른다. 왜 나고, 늙고, 죽는지 모른다. 그것에 대한 여러 설명이 있지만 그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는 설명들이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그렇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레벨:5]블루군

2013.05.04 02:50:15

 요한복음 1장 18절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는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사람이 나를 보고 살수 없다는 구절(출 33:20)의 대구 구절임을 알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 걸쳐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고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는(그분의 실체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은 없다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한다는 고백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한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직접 얼굴을 마주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화를 통해서든 아니면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만약에 반대로 성경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류하는 사람은 죽는다는 더 큰 명제를  이야기했다면 더 작은 명제인 직접 보는 사람도 당연히 죽는 결과가 나오겠지만 지금은 반대의 경우라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이 주어지고 그 후에 선지자들이 그 글들을 읽어 깨달음을 얻은 것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니까요.

하지만 아브라함과 모세의 시대는 다릅니다. 말씀이 주어지지 않은 시기였으니까요. 이 시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직접적인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하심이라는 것이 없이 자의적 의지와 하나님의 섭리만으로 고향을 떠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사용하려는 믿음도 결국 아브라함이라는 존재를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수사이고,
후세에 칭송하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결국 실체가 없는 고백이 되겠죠.

모세의 경우도 결국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율법을 만들었고,
그런 율법을 포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포장하는 것일 뿐일 테구요.

저는 성경이 주어진 이후의 하나님과의 교류는 전적으로 성경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현시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듣는 것은 불가능하며, 비슷한 현상은 깨달음이 자신의 무자아를 거쳐 나오는 생각이라고 봅니다만)

빈약한 근거(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니 그 뜻을 들은 사람도 없다)를 가지고 구약 초기의 모든 것들을 문학적 수사로만치부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그 시대에 맞게 특별하게 역사하셨다고 생각하면 되지 모든 기사와 이적을 부정할 이유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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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05.04 23: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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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루군 님,
재미있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무 많은 것을 말씀하셨네요. ㅎㅎ
그러니까 성경 전과 후의 하나님 경험이 다르다는 말씀이지요?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거기서 성경이 주어진 이후는 언제를 말하는 건지요.
초기 구전 시대인지,
중간의 전승과정인지,
또는 구약이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서
경전으로 결정된 기원후 90년(얌니야 회의)인지
조금 더 정확하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신약도 기원후 397년(카르타고 회의)에야 경전이 되었네요.
블루군 님은 그냥 성경이 형성되는 그 전체 과정을 보는 거겠지요.
이런 문제는 복잡해서 여기서 깊이 토론하기는 어렵습니다.
블루군 님의 생각과 달리 저는
성경 전이나 후나 하나님 경험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거나 듣거나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은
아직도 생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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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길위의벗

2013.05.06 15: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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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루군님, 안녕하세요?
 출애굽기 33:22,23에 보면 모세가 얼굴은 못 볼 것이지만 등은 '볼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이사야 6장 같은 경우에도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 구절은 또 어떻게 받아 들여야할까요? 음성을 들었다는 구절들은 '직접' 들었다는 것이고, 이 구절들은 '문학적 수사'인가요?

 사람이 존재하고 의사소통의 수단인 음성이 존재하듯 하나님께서 계시고 의사소통인 수단이 음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이해한다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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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05.06 23: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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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뜻 자체가 하나님라는 표현이
아주 강하게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곧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뜻과 통치가 곧 하나님이지요.
잘 배웠습니다.

[레벨:7]2C120

2013.05.07 00:47:55

 그 정의(定義)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God Himself)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뜻(will)’은 ‘하나님의 의도(intention)’이며,
하나님의 통치(reigning)’는 ‘하나님의 권위와 뜻이 행사되어 실현되는 것’을 지칭하고,
하나님 나라(Kingdom)’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시는 영역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분의 영광을 표현하시는 영역’을 의미하는 것일
터인데,
성서 진리 인식에서
그 각각이 또 그렇게 비빔밥처럼 뒤섞여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 버릴 수도
있는 건지.. ??
다시 궁금해지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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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길위의벗

2013.05.07 09:34:38

2C120님, 반갑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등의 단어는 일종의 비유가 아닐까요?
 
'사람'은 '사람 자신'을 가리키고,
'사람의 뜻'은 '사람의 의도'이며,
'사람의 통치'는 '사람의 권위와 뜻이 행사되어 실현되는 것'을 지칭하고,
'사람의 나라'는 '사람이 사람 자신의 권위를 행하는 영역으로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의 영광을 표현하는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인간의 경험적 인식인데,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는 사람이 사람의 인식과 언어로 하나님을 말하려다 보니
하나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와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을지 않을까요?
 
원기둥을 위에서 보면 원이라 말할 것이고 옆에서 보면 사각형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의 원기둥이 듯이요.

[레벨:5]블루군

2013.05.07 01:48:48

 제가 이해력이 떨어지는건지 질문의 요지를 모르겠네요.

일단 제가 이해한 바에 따라 대답하자면

1. 출애굽기의 내용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행위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것인데 이것을 문학적 수사로만 넘기고 하나님을 본 자가 없기에 하나님을 경험한 자가 없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오류라는 말입니다.

2. 계속해서 반복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경험함이 없이 어떻게 율법을 얻었을까요? 문학적 수사라고 한다면 그저 자신이 자연을 바라보면서 느낀 신에 대한 깨달음만으로 율법을 얻었다는 소리인데요. 아브라함의 경우도 신에 대한 깨달음만으로 이삭이나그 외의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위의 일들이 모두 문학적 수사일 뿐이라면 신과의 관계를 너무나도 과대포장한 부실하고 허망한 신화에서 발전된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3. 최소한의 모세오경이 나오기 전에 말씀이 없던 시절에는 직접적인 계시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직접적인 계시가 없다면 기독교는 근본 자체가 이상해지는거죠. 신은 가만 있는데 인간이 '신의 뜻이다'라고 주장하며 종교를 만들었다라면 우리는 그 종교가 신의 의지를 반영하는지 알 길이 없죠. 신은 가만 있으니까요.
 결국 신의 뜻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신의 의지를 알아야 하는데 자연적 법칙만으로 신의 뜻을 다 알수 없죠. 결국 어느 시점에는 신의 개입이라는 신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에 대한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근본에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4. 이사야서 6장의 경우는 환상을 본 것 아닌가요? 설마 문자 그대로 본 것을 가지고 문학적 수사다라는 것의 증거로 사용하려는 것은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만약 환상이 아닌 실제라면 요한복음 기자가 그렇게 표현을 할 리가 없죠.

5. 사람존재 -> 의사 소통 수단존재
    하나님 존재-> 의사 소통 수단 존재가 아닌 하나님 = 의사소통 그 자체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요.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위의 내용은 설명이 전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듣기 좋은 말일 뿐입니다.
   아니면 제가 잘 몰라서 그러니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위의 내용을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6.  기독교는 유일신이자 인격신 신앙으로 시작했습니다만 지금은 범신론적 요소도 상당히 많이 삽인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기본적인 요체는 인격신 신앙입니다. 인격신 신앙을 무시하고 범신론적 요소만 남긴다면 그건 이미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이 많이 어렵고 다소 공격적이 되어서 죄송합니다. 일단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중언부언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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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길위의벗

2013.05.07 10:07:41

1. 출애굽기의 내용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행위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것인데 이것을 문학적 수사로만 넘기고 하나님을 본 자가 없기에 하나님을 경험한 자가 없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오류라는 말입니다.
 
-> 저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시각'을 통한 인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다'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시각'을 통한 인식이 없었기에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는 말 자체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2. 계속해서 반복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경험함이 없이 어떻게 율법을 얻었을까요? 문학적 수사라고 한다면 그저 자신이 자연을 바라보면서 느낀 신에 대한 깨달음만으로 율법을 얻었다는 소리인데요. 아브라함의 경우도 신에 대한 깨달음만으로 이삭이나그 외의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위의 일들이 모두 문학적 수사일 뿐이라면 신과의 관계를 너무나도 과대포장한 부실하고 허망한 신화에서 발전된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아래에 포크숟가락님이 댓글에 적으셨듯이,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이 '경험'이란 말로 혼용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아닐는지요?
 
 
3. 최소한의 모세오경이 나오기 전에 말씀이 없던 시절에는 직접적인 계시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직접적인 계시가 없다면 기독교는 근본 자체가 이상해지는거죠. 신은 가만 있는데 인간이 '신의 뜻이다'라고 주장하며 종교를 만들었다라면 우리는 그 종교가 신의 의지를 반영하는지 알 길이 없죠. 신은 가만 있으니까요. 결국 신의 뜻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신의 의지를 알아야 하는데 자연적 법칙만으로 신의 뜻을 다 알수 없죠. 결국 어느 시점에는 신의 개입이라는 신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에 대한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근본에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 모세오경이 쓰여지기 전에도 분명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기에 모세오경이 쓰였겠지요.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을 것이고 그것이 세월이 흐르며 검증이 되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되어(이 과정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오경의 내용으로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4. 이사야서 6장의 경우는 환상을 본 것 아닌가요? 설마 문자 그대로 본 것을 가지고 문학적 수사다라는 것의 증거로 사용하려는 것은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만약 환상이 아닌 실제라면 요한복음 기자가 그렇게 표현을 할 리가 없죠.
 
->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3)에 대한 블루군님의 이해가 궁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등은 '보았다'는 것인데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는 없겠죠.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문학적 표현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같은 출애굽기 구절을 두고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만을 실제적 표현이라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5. 사람존재 -> 의사 소통 수단존재
    하나님 존재-> 의사 소통 수단 존재가 아닌 하나님 = 의사소통 그 자체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요.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위의 내용은 설명이 전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듣기 좋은 말일 뿐입니다.
   아니면 제가 잘 몰라서 그러니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위의 내용을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간접적으로 나마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요 1:18)'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없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표현과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 같은 '제 이해'를 바탕으로 정용섭 목사님의 글을 다시 써보겠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의도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제 이해가 이러합니다)
 
 요 1:18절은 좀 심각한 내용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직접 경험한) 사람이 없으되...’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난(=직접 경험한) 것처럼 읽힐 수 있는 사건들이 적지 않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모세도, 여러 선지자들도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거나 보았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적인 수사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가 없다(=사람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가 없다 = 사람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을 본다는 것, 즉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생명이 무언지 모른다. 왜 나고, 늙고, 죽는지 모른다. 그것에 대한 여러 설명이 있지만 그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는 설명들이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본(직접 경험한) 사람은 없다. 보았다(직접 경험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그렇다. ‘본래 하나님을 본(직접 경험한) 사람은 없다.’
 
 
6.  기독교는 유일신이자 인격신 신앙으로 시작했습니다만 지금은 범신론적 요소도 상당히 많이 삽인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기본적인 요체는 인격신 신앙입니다. 인격신 신앙을 무시하고 범신론적 요소만 남긴다면 그건 이미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 1~5번에 관한 제 생각이 6번에 대한 대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Plus a. 성경이 주어진 이전에도 하나님의 (간접) 경험은 있었고,
b. 성경이 주어진 현시대에 성경에 의지해야하는 것은 옳지만, 일상과 창조세계 등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댓글과 마찬가지로 저도 성경 전이나 후나 하나님 경험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이 주어진 현시대에는 우리의 하나님 경험을 성경에 비추어 확인해 보아야겠지요.
 
제 질문이 다소 어지러웠던 것 같아요. 블루군님의 댓글을 '공격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블루군님과 대화할 수 있어서 즐겁답니다. 사이버 공간이 묘하네요. 직접 대면해서 대화하면 화기애애하고 더 즐거울 것 같아요.

[레벨:12]라크리매

2013.05.07 11:04:25

직접과 간접경험으로 나눈다면 직접경험이란 단어는 감각과 직접적인식을 통했을 경우를 지칭하겠죠
성경에서 `하나님을 보다 음성을 듣다..`는 표현을 직접인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나요?
블루님의 직접경험이란 표현이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한 보거나 듣는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엔크리스토님의 간접경험과 같은 의미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경험이라 표현한 것 일뿐 두분의 의견은 동일한 얘기신 것 같네요
정목사님의 묵상글에서 구약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던 유대인의 경험들을 문학적인 표현으로 일괄하는 것은 곡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성경전과 후 모두 하나님의 경험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기록하였다는 것. 그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레벨:5]블루군

2013.05.07 11:19:42

 enchristo님은 보다라는 말의 의미를 직접 경험하다(존재)라는 규정하고 계시군요.
그렇게 도식화 시키고 들어가시기에 저와는 인식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건 평행선일 것 같네요.

이야기의 편의를 위해
직접경험 =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경험함.
간접경험 = 자연이든, 성경이든 무슨 수단을 통해서든 하나님의 계시를 간접적으로 깨달음.
이라고 정의해 봅시다.


1. 일단 모세의 경우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다라는 진술에 대해 저는 직접 경험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엔크리스토님은 간접경험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겠네요.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분의 의지에 의해 '직접적'으로 체험한 일을 단지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은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간접적' 경험으로 하락시켜야 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위의 일은 '직접적' 경험입니다.

2. 이사야서의 이야기는 환상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지 그 자체가 보다라는 말의 문학적 수사를 지지하는 근거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3. 성경전후나 하나님의 경험이 똑같다는 말은 성경이 없는 자연상태에서의 깨달음만으로도 충분히 신의 의도를 알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인격신이 아닌 만물에 유하는 범신의 개념만으로 접근 할 때 가능한 개념이기도 하죠. 
 

4. 직접적 경험이 없다라고 명쾌하게 정의를 내려버리면
아브라함의 경우 고향을 떠난 것이 자연상태에서의 깨달음이었고, 이것이 성경에서 문학적 수사로 미화된 것이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한 것도 아브라함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겠다라고 생각하다가 나중에 이를 돌이킨 것은 성경에서 문학적으로 미화한 것이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받은 약속도 아브라함이 자연 상태에서 깨달은 것일 뿐이라고 믿는 겁니다.
 
 모세의 경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의 의지로 한 일(출애굽, 율법 등)이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된 것이다라고 말해야 겠네요.

 이런 바탕에서 기독교가 자연적 계시만으로도 충분히 구원에 이를 수 있다라는 것을 말하는 종교라면 저는 차라리 단군신화를 믿겠습니다. 곰이 사람이 되는 얼마나 휴머니즘적인 일인가요?
원 글에 너무 댓글이 이상하게 많이 달려서 댓글을 안 달려고 자제했습니다만 또 달고 마네요.
 이 정도면 제가 하고픈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습니다(사실 차고 넘치죠. )
 필요하시다면 다른 글을 만들어 주시면 거기서 논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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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길위의벗

2013.05.07 12:58:11

 열린토론방에 글을 만들었습니다. 이야기를 서서히 마무리 지어야 할 시점에 글을 만든 것 같아서 좀.. 거시기 하지만..^^

[레벨:5]블루군

2013.05.05 00:12:29

 그렇게 어려운 것을 적은 것이 아닌데 서로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습니다.

 1.
제가 이야기한 말씀이 주어지기 전과 후의 기준은 모세오경입니다.
그것이 구전이든 아니면 구전을 정리한 것이든, 모세가 썼던지, 아니면 후세에 정리된 것이든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받은 것이 정리된 후의 시점과 이전의 시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위에 단 댓글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셨더라도 
'선지자들이 말씀을 근거로 깨달음을 얻은 것을 들은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라는 문장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지 않는한
제가 성경이 주어진 시기에 대해 경전으로 형성된 시기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음을 쉽게 알수 있을텐데
왜 문장을 제대로 안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2.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의 요지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라는 성경구절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라는 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논리적으로 따져도 명확한 것이기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라는 주장에 대해서 다른 근거가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3.
하나님을 볼 수 없다라는 말은 정목사님의 주장에 따르자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문학적 수사일 뿐인 출애굽기의 문장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이를 인용한 것이구요.
출애굽기의 표현이 문학적 수사라고 이해를 한다면 이에 근거한 요한복음의 표현도 문학적 수사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의 특정부분이 맘에 드니 그 부분만 떼어서 '이 부분은 사실이고 나머지는 문학적 수사야'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4.
성경전이나 후나 하나님 경험이 똑같다 라는 말의 의미는
= 성경전에도 하나님을 똑같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데,

= 성경의 말씀이 없이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 성경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라는 논리로 확장이 가능하겠네요.

기독교가 기독교인 이유가 성경을 근거로 신에게 참예하기에 기독교인데
신에게 참예하는 방법이 성경 그 이상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라기 보다는
신에게 참예하기 위해 기독교라는 방법론을 이용하는 다른 종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가 뭐꼬에서 정목사님이 말씀하신 산을 올라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오버랩 되네요.

[레벨:16]맑은그늘

2013.05.05 01:35:24

볼 수 없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네요.
나무라는 것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나무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나무를 볼 수 없다면 나무라는 말 자체가 없을 것이고,
없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당채 알 수가 없네요.

[레벨:12]라크리매

2013.05.05 02:02:22

나무의 향 . 바람에 나붓기는 나뭇잎의 소리..
경험할수 있는 것이 많죠
보는 것은 일차원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나무라는 언어는 나무를 상징하는 단어일뿐이지만
나무가 먼저 있었고. 나무를 경험하게 되니. 나무라는 단어가 생겨 . 나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우리는 나무에 대한 모든 감각적 경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됩니다

[레벨:16]맑은그늘

2013.05.05 02:15:28

예, 맞습니다.
향이나 소리는 나무라는 것이 있어서 생겨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나무 자체가 없는데, 그 나무를 경험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해서 경험할 수 없을 수는 없다는 말은 다르지 않나요?
하나님을 볼 수 없어도 경험할 수는 있다. 이 말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과 같고요.
하나님이 없는데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은 뭐라 말해야 하나요?

[레벨:16]맑은그늘

2013.05.05 02:22:34

 제 뜻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경험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레벨:12]라크리매

2013.05.05 02:36:42

성령은 볼 수 있나요? 볼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령도 존재하지 않는거죠

[레벨:5]블루군

2013.05.05 03:19:10

출애굽기 33장 후반부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직접 보면 죽는다고 하시며 바위틈에서 가리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직접보지는 못했지만 그 영광에는 참여(또는 그 영광을 경험)하게 하신 것이죠.


저는 호미님의 인식이 궁금합니다.
초기댓글을 보면
보다라는 표현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보인다라는 인식을 가지는가 싶다가도

후반의 댓글을 보면
무신론자로서의 신의 인식이 느껴지거든요.
볼 수 없는 존재(호미님의 인식에는 존재하지 않는 실체)는 경험할 수 없다라는 인식아래
하나님은 볼 수 없는 존재이므로 경험할 수 없다라고 사고의 흐름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위의 논리는 하나님은 볼수 없는 존재이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귀결되네요.

위의 댓글의 논의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이미 존재하는 실체에 대해서
보지 못한다고 실체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통해 그 실체와 교류할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호미님의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면 경험할 수 없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에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되구요.
결국 성경이란 것은 허구의 이야기 일 뿐이라는 말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교류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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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잠자는회색늑대

2013.05.05 08:3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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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도 같은 소리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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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2013.05.06 23: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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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도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이 있죠.

본문에는 '직접 경험'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댓글에서는 '간접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직접 경험을 할 수 없다고 간접 경험까지 할 수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레벨:7]2C120

2013.05.06 23:42:31

1.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거나 보았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적인 수사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가 없다.”
라고 진술된 부분에 관하여 :
 
(1-1)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거나 보았다는 의미인가?”
라는 문장부터가 이미 ‘복합질문의 오류’가 있는 문장 진술입니다.
아시다시피 ‘복합질문의 오류’란
둘 이상의 질문으로 나누어야 할 것을 하나로 묶어 질문을 함으로써
어떻게 대답하든 수긍할 수 없거나, 수긍하기 싫은 것까지 수긍하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언어 논리적 오류’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가령
영희야, 너 이 약을 사용해서, 여드름을 치료하고 싶지 않니?”라든가
당신 횡령한 돈으로 부동산 투기했지?—아니에요.—그러면 횡령한 건 사실이군. 횡령한 돈은 얼마요?”
하는 식이죠.
청각이라는 감관을 통한 듣기’ 와 ‘시각이라는 감관을 통한 보기’란
인간 자신의 '감관을 통한 직접적 경험’이란 범주 안에 있는 것이란 점에서야
마찬가지 동일 범주 안에 있는 경험인 것이지만
그 체험의 영역과 ‘직접성’에 있어서의 정도에 있어서
서로 동일한 형태의 ‘직접적 경험’일 수는 없는 것일 터인데 (욥 42:5)
매일묵상 본문에서는
음성을 듣는다’라는 것을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거나 보았다’는 의미와
마찬가지인 것으로
간주해서 질문을 제기하고 있으니
질문 자체부터가 일단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1-2)
아니다. 그것은 문학적인 수사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가 없다.”
라는 진술 자체만 놓고도
게시물 원글 필자 분의 다른 곳에서의 진술과는 어긋나는, 즉 독자로서는
자기모순을 대할 수가 있는 진술 모습들이 아닌가 하는데,
가령,
2012년 10월 22일의 설교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다”의 설교 본문에서는
아래와 같은 발언이 진술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은 성서기자들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하나님은 절대적인 능력이십니다. 궁극적인 생명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다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곧 욥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라고 해서

위 설교에서는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욥이
궁극적인 생명이시고 절대적인 능력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네요.

다시 말해, 진술 내용 및 어휘 어법 용례 자체만 놓고 보아도

이 매일묵상 페이지에서는
구약 성경에 더러 나오는 진술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을 보았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문학적인 수사일 뿐이며,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가 없다.”
 
라고 하고 있는 데 반해서,

다른 설교 페이지에서는
“(이 구약 성경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셨다 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라는 그 구약 성경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인) 욥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2.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을 본다는 것, 즉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생명이 무언지 모른다. 왜 나고, 늙고, 죽는지 모른다.
  그것에 대한 여러 설명이 있지만 그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는 설명들이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그렇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
라고 진술된 부분에 관하여:

이 매일묵상 페이지 원글 내용은,
 
그저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의 글들을 다른 사이트에서 우연히 보게 되어
정 용섭 목사님의 '설교 비평' 아닌 목회 사역 메시지들을 살펴 보고 싶어 이 사이트에 들어와 봤다가
이런저런 게시글들을 대하게 되면서  
독자로서는, ‘생명의 인식과 체험’에 대한 부분에서
큰 의구심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던 측면과 관련해, 다시 말해
사이트 글들과 댓글 대화 모습들을 대하면서 감지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의 정상적 운행에 있어서의 의구심과 관련해,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예시가 되는 발언들 모습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본다” 내지 “하나님을 보아 안다”라고 하는 건 당연히,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감각 기관을 통한 직접적 체험 인식(‘앎’)이 아닌 것이니
(딤후 6:16; 마 5:8; 히 8:11; 요일 2:27; 요 17:3; 엡 1:17)
 
직접 만지고 직접 보고 인식한다는 식으로 아는 것이 아닌 것이고, 따라서,
가령 히브리서 8장 11절에서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라고 할 때
전반절의 ‘앎’이
하나님의 행사(the doings of God)’와 ‘하나님의 통치 법칙(the ways of God)’을 인식하는 정도의
외적 인식인 ‘앎’(knowing the doings or ways of God)이라면
후반절의 ‘앎’은
새 언약’ 이후 그리스도 주 예수님을 통해서 거듭난 성도들의
내적 인식인 ‘앎’(knowing God Himself)을 가리키는 것처럼
(히 8:11b; 요일 2:27; 요 17:3; 엡 1:17)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체험한다, 하나님을 인식한다
라고 할 때 의미는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 거듭나고 연합된 우리 사람의 영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온 생명의 법과,
하나님의 성령에서 나온 기름 바르심을 통해
즉,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고 역사하시며 우리 삶을 조율하실 때
또는
하나님 자신의 체현인 성령의 기름 바름의 가르치심이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롬12:2)된 우리의 이해력 안에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알게(골 1:9) 하실 때
우리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참 생명인 그분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페이지 원글에 의하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을 본다는 것, 즉 그것(궁극적인 생명)을” “직접적으로(?) 인식한다는 것”(?)
 ( 이 구절에서의 ‘직접적 인식’이란 게시글 원문 문맥에 의하면
   영적 직관에 의한 인식이란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감관을 통해 감각적 직접성으로 경험한다는 의미로 제시되어 있지요 )
이라고 규정한 다음에
 
지금 이 세상의 생명이 무언지 모르고, 왜 나고, 늙고, 죽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그게 가능한지 생각해 보라”면서, 따라서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그렇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
  ( 이 구절에서의 원글 문맥에 의하면
    '신체적 감각 기관인 시각의 직접적 인지 경험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궁극적 생명인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인식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라는 의미로 제시되어 있지요 )
로 결론을 내리고 있고
 
아울러,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전제해 놓고 나서는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고,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라면서
그렇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라고 하는 구약 성서 구절도 문학적 수사일 뿐”이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거나 보았다 는 얘기는 아니다.”
라고 결론 내리고 있으니
 
하나님을 본다’는 것 내지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에 대한
진리 인식에 대한 토대부터도 (다비아 식 표현으로 하자면 “진리론적 토대”부터도)
의구심이 가는, 다비아 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자
금상첨화(?) 격으로 거들겠다고 나선 표현을 인용해 말하자면
또 하나의 “전형”적인 “바람과 같은 소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3.

(3-1)
매일 묵상’(?) 대화들을 대하면서 독자로서 느끼게 되는 점은 우선적으로,
성경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어서 이 매일묵상 필자 분의 진지함과 그 진정성 자체에 대한 의구심인데,
   ( 소소한 일상의 메모나 일기에 해당하는 것들이 상당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는 이 게시판, 
     심지어 때로는
     “성경은 못 읽어도 악기 리코더는 연습 해야겠어요”라는 발언도 나오곤 해서,
     뭐 칼 바르트의 모짜르트에 대한 고백 정도를 염두에 둔 “과감한 글쓰기”(?)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야 그럴 듯한(?) 발언이겠지만, 
      사역자로서의 그 진정성과 그 영적 부담이란 점에서 본다면 당연히 
      독자로서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어서 
      성경에 대한 필자 분의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는 진술 등등을 
      종종 마주치게 되는 수도 있네요.. )
매일 '묵상’(?)이란 명색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 게시판의 거의 대부분 내용이나 화제가,
사실상 매일 '묵상'이라기보다는 사랑채 담화 수준에서
일상 메모나 한담 정도의 무게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솔직한 독후 소감을 그대로 내놓게 되어 독자로서도 유감이긴 합니다만, 
때때로
단지 성서 구절이라는 타이틀로 화제만 옮겨간 채
그럭저럭 익숙한 성구 해석(?)을 “살짝 건드리면서”
그럭저럭 답은 제시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 형태로 해서 
성경 관련 메뉴만 “살짝 집적거리며” 내놓고 있는 게 아닌지,
이 매일 묵상 필자 분께서 과연 얼마나 치열하게
해당 성구의 심층적인 영적 의미를 천착해 보려 자신의 존재를 기투(企投)하고 있는 것이며,
이 매일 묵상 필자 분께서 과연 얼마나 절실하게
 
독자들에게 미칠 생명 공급/분배를 위한 영적 부담을 지니고
글을 게시하고 있으신 건지
그 글쓰기 ‘의도’의 진정성과 순수성의 정도에 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게
게시판 내용을 대하는 독자로서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3-2)
'하나님 인식'에 대한 "진리론적 토대" 자체가 이질적으로 그러하고
하나님에 대한 내적 인식과 생명 체험이 없는 경우라면,
하나님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기꾼이다'
라고 말하거나  

구약에 기술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을 놓고
'그런 표현 내용은 
(감관을 통한) 직접적 감각 경험으로 인식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학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그 나름의 인식 안에서는 타당한(?) 진술인 것으로 보이네요.

[레벨:7]2C120

2013.05.07 13:14:06


하하… 아, 네~~

누구에게 한 질문인지도 아랑곳 없이, 즉 대화 예의도 없이
남들의 대화에 양해도 없이 끼어들어서는
'내 답변'(?)이나 대신 들으라고 왈가왈부 떠드신
ENCHRISTO 라는 닉네임 쓰는 분?
 
=======================================================================
 
하나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등의 단어는 일종의 비유가 아닐까요?
 
'사람'은 '사람 자신'을 가리키고,
'사람의 뜻'은 '사람의 의도'이며,
'사람의 통치'는 '사람의 권위와 뜻이 행사되어 실현되는 것'을 지칭하고,
'사람의 나라'는 '사람이 사람 자신의 권위를 행하는 영역으로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의 영광을 표현하는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인간의 경험적 인식인데,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는 사람이 사람의 인식과 언어로 하나님을 말하려다 보니
하나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와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을지 않을까요?
 
원기둥을 위에서 보면 원이라 말할 것이고 옆에서 보면 사각형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의 원기둥이 듯이요.
 
=======================================================================
 
라고 댓글(2013.05.07 09:34:38) 을 달면서 
이쪽 질문 상대도 아닌 터에 초대하지도 않은 질문 답변자로 끼어드셨는데,
 
 
달아 놓은 님 댓글 내용인즉슨
이름하여 ‘outside Christ’에서만 나올 수가 있는, 어설픈 궤변 포즈로군요 마는, 어쨌든
님의 ‘하나님 인식’(?) 에 관한,
그럴 듯한 '무늬'조차도 거의 못 갖춘, 안쓰러운 억지 변설(辨說)의
'문학적 수사/비유'론은 잘 들었습니다.
껄껄..
     ( 하긴,  '궤변'이란 건 원래 조금은 정밀한 고안 장치와 기제가 있어야 하는 거니까
      '궤변'이란 표현은 실상 너무 부적절하게 치켜세운 듯한 말로 보이고
       간단히 얘기해서, 님 발언 내용 같은 건 보통은 '상두복색'이구나 하고 그냥 외면해 버리고들 만다는.. ^^ )

이 페이지에서의 논의 핵심은,
게시물 원글의 ‘하나님 인식’이
신약 시대 그리스도인들—일반 타 종교인들이 아닌—로서의 하나님 인식, 즉
참 생명이시고 내주하시는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 인식’이라고 하는
진리론적 토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런 상황이다 보니
 
그 필자 분이 부연 설명하신 댓글 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경 전이나 후에나 하나님 경험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귀'로 듣기에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발언을 듣게 될 수도 있는
웃지도 못하는 상황이 다 연출되는 것이며
 
게다가,
그처럼 “성경 전이나 후에나 하나님 경험이 똑같다”(?)는 주장의 근거(?)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궁극적 생명이신 하나님을 <자신의 신체 감각 기관을 통해 직접 인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정도의,
뭐 그럭저럭 유신론적 종교철학—그리스도 신앙이 아니라—정도에서 나올 법한 스토리가
그 ‘근거’(?)라는 얘기이고,
 
더욱이 다시 게다가,
<성경 전이나 후에나 하나님 경험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는 주장을 위한 그런 근거(?)를 가지고,
구약에 기술된 ‘하나님 경험’ 진술들, 즉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라든가 하는 진술들을 놓고
그리스도 이전 당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경험”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그런 진술들은 다만 “문학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라고 하는 성경관도 제시해 주시고 있다는 얘기들을
 다들 하고 있었던 건데
 
   (  다시 게다가,
  ‘직접 경험’이라고 할 때의 그 상식적 의미는
      '어떤 상황이나 사태나 대상'에 대해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 
       가령 그에 대해
       남의 말을 간접적으로 들어 알게 된다든가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해 인식한다든가
       논리적인 추론
경험을 통해 인식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가, 해당 상황이나 사태나 대상 자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는 경험을 통해 인식한다
   라는 뜻이 일반적인 것이고
 
    따라서
    ‘직접 경험’이라고 얘기할 때 그 경험의 ‘직접성’이란 것은
(a) 그 ‘자신의 신체적 감각 기관을 통한 직접 체험으로서의 직접성’이든
    또는
(b) 각별히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 경우라면,
             ‘우리 각각의 영적 직관을 통한 내적 생명 인식으로서의 직접성’이든
       
        으로서의 의미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게시물 원글 필자께서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는 성경 구절을
    ‘인간이 자신의 신체적 감각 기관을 통한 직접성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다’
        로 규정한 다음
    그런 고로
       성경 전이나 성경 후나 하나님 경험은 똑같다” 면서, 다시 말해
        게시물 원글 필자의 이해에 의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 인식할 수 없다’
     라고 하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 인식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 게시물 원글 필자 이해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신체 감각 기관으로 직접 경험해 인식할 수는 없으니까 )
        라고 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 경우에 적용되는 바,
    ‘각각의 영적 직관의 직접성을 통한 하나님 인식’ 자체에 대한 개념을 
        흐려 놓는,  
상당히 심각한 위험이 보이는 발언을 하신 상황일 뿐만 아니라
 
     구약 당시 성서 기자들이 이야기하는 당대인들의 ‘하나님 경험의 직접성’ 또한
     단지 “문학적 수사에 불과한 것” 으로 치부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는 얘기인데 )
 
 
그런 상황을 놓고 그걸 어떻게 거들어 보겠다고 끼어들어서
지나가던 나무아미타불 동자도 듣고 웃을 것만 같은 그런 황당한 답변 내놓느라 나름 수고하신 님,
님의 그런 ‘비유’론(?)이란
‘outside Christ’와 ‘outside the Kingdom of God’에서나 통하고 먹히는 것임을
모쪼록 아시기 바랍니다.
 
 
(PS)
(1)
질문-답변 게시판이나 열린 토론방 같은 게시판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게시판 모양새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게시판 댓글 달기 설정 자체가
모든 댓글들이 각각 달린 시각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게시되도록 설정하는 게 적절하겠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발언(a)이 있고 그 발언에 대한 답변 댓글 발언(b)이 이루어진 경우
최초 발언(a)에 대한 답변 댓글 쪽(b)에서는 기초 독해의 바탕 위에서 답변 댓글을 이미 냈음에도 불구하고
기초 독해가 안 된 다른 엉뚱한 판독자(c)가 이미 달린 댓글(b) 위에다가
자신의 어처구니 없이 엉뚱한 독해에 근거한 댓글(c)을 또 달아 놓곤 해서
나중에야 전체 게시판을 대하게 되는 독자들 경우라면 더욱이,
앞뒤 안 맞게 뒤죽박죽 혼란스럽게 어지럽혀진, 아주 황당한 게시판을 대하게 되겠네요. ^^
(2)
댓글 달리는 시각 순서대로 각자가 댓글을 달면서
자신이 지목해 대화하고자 하는 댓글 상대자는 명기해 두는 일도 필요할 듯합니다.
어떤 분들은 독해에서 그 부분도 헷갈리는 일이 있는 듯하니까요. ^^
 
profile

[레벨:9]길위의벗

2013.05.07 14:2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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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C120님,
비유의 핵심은 다만 인간의 '인식의 한계' 였습니다만,
outside Christ에서만 나올 수 있는 변설자가 되어버렸네요.

뭐. 아무튼 열심히 배우고 공부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페이지에 댓글은 여기까지만 달겠습니다.

[레벨:7]2C120

2013.05.07 22:33:12

 
하하.. 아, 네~~
 
님이 이 게시물의 관리자 역할 총대를 메시고,
 
다른 페이지에서의 님 자신 댓글 표현을 가져와 표현하자고 하면
이 페이지에서 솔선수범하셔서는
정말 싸워야 할 곳을 잘 보고”(?)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지 않고”(?) “잘 싸워 주시”(?)더니만
 
또 이 게시물의 관리 중재자로서
이 페이지를 ‘열린 토론방’으로 옮겨 놓고서 거기다 님 댓글을 달아 놓으셨으니
 
뭐, 회원 독자들로서야
님의 진면목과 “핵심”을 잘 “구경”하고 있으니 그 점은 부디 염려 놓으시기 바라고,
 
정용섭 목사님께 드린 남의 질문에 중간에 끼어들어와서는
질문 받지 않은 대상자로서 이쪽 이름을 지칭하면서 대타 역을 자처한 준 무공에 더해서
 
이 게시물의 마지막 교통정리(?) 사회자까지 자처하며
핵심”(?) 운운으로 이 페이지에 여운(?)을 남겨 두시려는

님의 그 가상한 마무리 노력과
님의 그 겸손한 "아량"(?)의 퇴장 인사 모습까지도

독자로서는 잘 보고 잘 “구경”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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