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114) 요 6:3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0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다시 표적을 요구한 뒤에 31절에서 자신들이 가장 특별한 표적으로 여기는 만나를 거론한다.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던 광야 시절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깊어질 수 있었던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만나이기에 이 대목에서 유대인들이 만나를 언급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메시아 자격이 있다는 논리다.
예수는 만나 사건의 주체를 모세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린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만나의 주체로 보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을 주체로 본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모세와 만나가 중요했지만 예수에게는 하나님이 중요했다. 예수가 모세의 만나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더 핵심적인 대상에게 관심을 돌리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만나에 제한받지 않고 사람들을 살리고 구원하는 분이기에 하나님에게 관심을 둘 때만 인간은 생명을 얻는다. 유대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를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표적을 구한 것이고, 예수는 그것의 모든 근원이 하나님이기에 하나님만을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만나를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오늘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일들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싸움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타단에서 시작되고 확산된다.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그런 이전투구에 휩쓸리지 않는다.
예수는 하나님이 ‘참 떡’을 내려주신다고 말한다. 만나는 유대인 조상들의 기아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으로 그 역할이 끝난다. 가장 소박한 먹을거리인 만나만이 아니라 고급 식탁도 사람을 일시적으로 즐겁게 할 뿐이다. 참 떡은 일시적인 기아를 해결해주는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준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영적인 초점을 근원적인 곳으로 돌렸다. 참 떡을 알아보는 사람의 인생에서는 실제의 만나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당연하다. 영혼이 배부른 사람은 조금 적게 먹고 살아도 억울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나로부터 참 떡으로 방향을 바꾸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