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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몬이 브루그만의 신학적이고 영적인 태도를 정확하게 묘사한 것처럼 ‘어린아이처럼 놀라고 사춘기 소년처럼 기뻐하는 모습’은 존재 지향적 설교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다. 기쁨 없이는 성서텍스트에 몰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삶에서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 사태는 성서텍스트의 깊이가 무한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 엄청난 깊이에 놀라고 가능한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에서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설교자가 바로 존재 지향적 설교자이다. 성서텍스트의 깊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일전 특강 중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귀한 질문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오늘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심층적이고 시원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단순하게 기록한 것에 불과한 성경 이야기를 오늘 신학자들이 너무 깊이 있는 것처럼 설명함으로써 오히려 성경의 본래 의미가 퇴색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 배경은 특강의 내용이다.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사도신경에 나오는 ‘하늘에 오르시어...’와 주기도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거론했다. 성경에 나오는 ‘하늘’은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된 곳이다. 그 생명은 예수의 부활에서 선취되었기에 기독교인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그 생명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 생명이 바로 구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늘을 공간 개념으로 보면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하늘은 땅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가리킨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하늘이라는 공간으로 이동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이는 곧 하늘나라를 가리키는데, 여기에 가까이 왔다고 말했다. 질문의 요지는 성경기자들이 하늘과 생명에 관한 신학적인 개념을 충분히 알고 그런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읽는 사람을 완전 궁금해지게 만드시고는 딱 멈추셨네요. ㅎㅎ 내일의 이어지는 답변을 기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