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1일 제자들의 두려움(5)

조회 수 1879 추천 수 10 2008.09.10 23:25:21
2008년 9월11일 제자들의 두려움(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의 부활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야겠지요.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것이니까요. 이게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부활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그래서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먼저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일단 신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면 부활은 종말론적으로 은폐된 궁극적인 생명입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네 단어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종말, 은폐, 궁극, 생명이 그것입니다. 각각의 단어도 단어이려니와 그 단어들의 결합된 사태가 더 중요하겠지요. 여기서 핵심은 부활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것이 와야만 알 수 있으니 우리가 어찌 부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설명할께요. 지금 우리는 숨을 쉬고, 무엇을 먹고, 가정과 사회를 구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부활 생명은 이런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족해하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성적인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그곳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늘나라에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익숙하게 생각하는 그런 생명 현상이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세계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기서 우리의 삶을 재미있게 만들고 있는 모든 것들이 없는 세계를 말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부활의 세계가 칙칙하고, 삭막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지금의 생명과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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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소풍

2008.09.11 02:30:54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생명의 차원 속으로 들어간다고 할 때
그 세계 속의 나를 과연 지금의 나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이르니 정말 아득한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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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비가오는날

2008.09.11 07:43:56

여기서는 성적인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레벨:1]머릿돌

2008.09.11 11:27:55

얼마전 연예인이 또 한명 자살했는데요.
그 영정사진 아래 성도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그가 쓴 유서에는 빨리 찾으면 쓸 수 있는 장기는 기증할테니 써 달라는 말과 함께
빨리 찾도록 '기도'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현재 우리 삶에 빗대어 소원풀이 삶으로 기대하기보다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감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떨까요?
저는 이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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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11 18:03:07

아득한 두려움은 느낄수록 좋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경험이라도 할 수 있구뇽.
부활의 세계와 자기의 정체성 문제는
그것 자체로는 대답을 찾을 수 없어요.
우선 지금의 자기 정체성이 무엇지를 잘 살펴야겠지요.
그런데 그것도 아직 결정된 게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거지요.
몸이 나인지,
졍신이 나인지,
그것의 결합이 나인지,
인격이 나인지 잘 모릅니다.
내가 자꾸 모른다는 말만 하는 것 같은데,
궁극적인 차원에서 모른다는 거에요.
잠정적으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정적인 것으로는 결코 궁극적인 것을 규정할 수 없으니
모른다고 말하는 것뿐이에요.
지금 나의 정체성은 아주 명백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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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11 18:05:48

생각의 꼬리물기가 중요합니다.
다만 그것이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 끝나지 말고
선배들의 생각을 배워야겠지요.
그게 신학이에요.
바울, 터툴리아, 오리게네스, 어거스틴, 에크하르트, 아퀴나서, 루터, 칼빈 등등,
그들도 모두 이런 생각의 꼬리물기를 했답니다.
그날이 오면 얼굴을 얼굴로 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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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11 18:08:11

하나님은 바로 그 알 수 없는 존재이지요.
불가지론의 차원이 아니라
종말론적 차원에서,
혹은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신비에서 그렇습니다.
신앙적 긴장과 불안을 회피하는 사람은
마치 마마보이와 같아서 참된 하나님 경험에서 점점 멀어지겠지요.
종말로부터 지금 하나님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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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8.09.12 14:28:55

저는 종말로 부터 오고 있는 하나님보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더 좋습니다.
지금 생수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 생명수 같은 은혜의 강가에 푹 빠져 드는 삶을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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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13 21:54:53

저별과달 님은 정말 재미 있는 분이군요.
종말에서 우리에게 오고 있는 하나님과
지금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이에요.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저별 님은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아이로 남는 게 좋아요,
아니면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 어머니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게 좋아요?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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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8.09.13 22:23:57

목사님, 저도 어서 빨리 성숙한 어른이 되어
어머니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궁금증도 많이 나는군요..
이런 시기를 거치다 보면 점점 장성한 아들이 되겠죠..
목사님, 올 추석은 좀 더울것 같군요.
오늘밤에 밝은 달이 저희 동네 바다위에 휘영청 떠 있습니다.
밤바다가 달빛에 반짝이고 있군요..
내일 일기가 좋아 환한 보름달을 볼수 있으면 좋겠군요^^
연휴 잘 보내시고 샘터교회에도 주님의 은혜가 풍성한 한 주간이 되기를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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