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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11일 제자들의 두려움(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의 부활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야겠지요.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것이니까요. 이게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부활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그래서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먼저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일단 신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면 부활은 종말론적으로 은폐된 궁극적인 생명입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네 단어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종말, 은폐, 궁극, 생명이 그것입니다. 각각의 단어도 단어이려니와 그 단어들의 결합된 사태가 더 중요하겠지요. 여기서 핵심은 부활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것이 와야만 알 수 있으니 우리가 어찌 부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설명할께요. 지금 우리는 숨을 쉬고, 무엇을 먹고, 가정과 사회를 구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부활 생명은 이런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족해하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성적인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그곳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늘나라에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익숙하게 생각하는 그런 생명 현상이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세계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기서 우리의 삶을 재미있게 만들고 있는 모든 것들이 없는 세계를 말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부활의 세계가 칙칙하고, 삭막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지금의 생명과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의 부활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야겠지요.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것이니까요. 이게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부활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그래서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먼저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일단 신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면 부활은 종말론적으로 은폐된 궁극적인 생명입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네 단어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종말, 은폐, 궁극, 생명이 그것입니다. 각각의 단어도 단어이려니와 그 단어들의 결합된 사태가 더 중요하겠지요. 여기서 핵심은 부활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것이 와야만 알 수 있으니 우리가 어찌 부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설명할께요. 지금 우리는 숨을 쉬고, 무엇을 먹고, 가정과 사회를 구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부활 생명은 이런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족해하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성적인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그곳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늘나라에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익숙하게 생각하는 그런 생명 현상이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세계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기서 우리의 삶을 재미있게 만들고 있는 모든 것들이 없는 세계를 말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부활의 세계가 칙칙하고, 삭막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지금의 생명과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아득한 두려움은 느낄수록 좋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경험이라도 할 수 있구뇽.
부활의 세계와 자기의 정체성 문제는
그것 자체로는 대답을 찾을 수 없어요.
우선 지금의 자기 정체성이 무엇지를 잘 살펴야겠지요.
그런데 그것도 아직 결정된 게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거지요.
몸이 나인지,
졍신이 나인지,
그것의 결합이 나인지,
인격이 나인지 잘 모릅니다.
내가 자꾸 모른다는 말만 하는 것 같은데,
궁극적인 차원에서 모른다는 거에요.
잠정적으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정적인 것으로는 결코 궁극적인 것을 규정할 수 없으니
모른다고 말하는 것뿐이에요.
지금 나의 정체성은 아주 명백할까요?
어쩌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경험이라도 할 수 있구뇽.
부활의 세계와 자기의 정체성 문제는
그것 자체로는 대답을 찾을 수 없어요.
우선 지금의 자기 정체성이 무엇지를 잘 살펴야겠지요.
그런데 그것도 아직 결정된 게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거지요.
몸이 나인지,
졍신이 나인지,
그것의 결합이 나인지,
인격이 나인지 잘 모릅니다.
내가 자꾸 모른다는 말만 하는 것 같은데,
궁극적인 차원에서 모른다는 거에요.
잠정적으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정적인 것으로는 결코 궁극적인 것을 규정할 수 없으니
모른다고 말하는 것뿐이에요.
지금 나의 정체성은 아주 명백할까요?
그 세계 속의 나를 과연 지금의 나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이르니 정말 아득한 두려움이 몰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