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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24일 제자들의 화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10:41)
야고보와 요한의 행태를 보고 제자들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럴 만도 합니다. 하나는 열 두 제자가 똑같이 고생한 마당에 그들 형제들만 특별대우를 받겠다고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상황이 제자들의 자리를 배려해줄만한 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행은 십자가형의 길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열 명의 나머지 제자들이 화를 냈다는 건 아무래도 모양이 우스워 보입니다. 도반의 길을 간다는 사람들이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까요. 숨겨 줘도 괜찮을만한 이야기를 마가복음 기자가 이렇게 까발리는 것은 이런 문제가 단지 제자 공동체만이 아니라 마기복음 공동체에서도 여전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오늘 신자들 사이에도 ‘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문입니다. 당연히 일어납니다. 요즘 서울의 아무개 교회가 기독교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교회 신자는 90% 이상이 대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적인 교회입니다. 담임 목사를 중심으로 지지파 당회원과 반대파 당회원들이 이전투구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화가 아니라 평화 공동체이어야 할 교회에서 이런 노골적인 싸움이 벌어지는 이유는 교회가 본질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여기서 신학적으로 무슨 거창한 본질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최소한 섬김 공동체라는 본질에만 충실해도 잡음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신자들끼리도 섬김의 관계이어야하지만, 대사회를 향해서도 역시 이 섬김의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에서 어떤 권한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섬김으로만 정체성을 유지한다면 서로에게 화를 낼 일은 없겠지요.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10:41)
야고보와 요한의 행태를 보고 제자들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럴 만도 합니다. 하나는 열 두 제자가 똑같이 고생한 마당에 그들 형제들만 특별대우를 받겠다고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상황이 제자들의 자리를 배려해줄만한 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행은 십자가형의 길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열 명의 나머지 제자들이 화를 냈다는 건 아무래도 모양이 우스워 보입니다. 도반의 길을 간다는 사람들이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까요. 숨겨 줘도 괜찮을만한 이야기를 마가복음 기자가 이렇게 까발리는 것은 이런 문제가 단지 제자 공동체만이 아니라 마기복음 공동체에서도 여전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오늘 신자들 사이에도 ‘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문입니다. 당연히 일어납니다. 요즘 서울의 아무개 교회가 기독교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교회 신자는 90% 이상이 대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적인 교회입니다. 담임 목사를 중심으로 지지파 당회원과 반대파 당회원들이 이전투구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화가 아니라 평화 공동체이어야 할 교회에서 이런 노골적인 싸움이 벌어지는 이유는 교회가 본질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여기서 신학적으로 무슨 거창한 본질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최소한 섬김 공동체라는 본질에만 충실해도 잡음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신자들끼리도 섬김의 관계이어야하지만, 대사회를 향해서도 역시 이 섬김의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에서 어떤 권한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섬김으로만 정체성을 유지한다면 서로에게 화를 낼 일은 없겠지요.
그렇지요.
우리에게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능력이 없답니다.
그런 마당에 원수사랑을 요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더 막막하게 만들지요.
이런 말씀들을 그저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사랑의 명령은 우리의 영성을 오히려 파괴한답니다.
그건 그렇고,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는 게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며,
그것을 곧 자기 초월인데,
그것이 주어진 경지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랑에 동참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자기 초월도 그냥 주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평생 도를 닦아도 다시 도로나무아비타불이 될 때가 많지요.
기독교 신앙은 그것이 밖에서 주어진다고 믿지요.
그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답니다.
우리에게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능력이 없답니다.
그런 마당에 원수사랑을 요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더 막막하게 만들지요.
이런 말씀들을 그저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사랑의 명령은 우리의 영성을 오히려 파괴한답니다.
그건 그렇고,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는 게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며,
그것을 곧 자기 초월인데,
그것이 주어진 경지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랑에 동참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자기 초월도 그냥 주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평생 도를 닦아도 다시 도로나무아비타불이 될 때가 많지요.
기독교 신앙은 그것이 밖에서 주어진다고 믿지요.
그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답니다.
'자기'에게 얽매이지 않는 것을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자신의 확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정신과의사인 스캇펙이 사랑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많은 사람들이(바리새인 빼고) 예수에게 가면 예수께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시대의 세리나 창녀들이 어떻게 예수에게 갈 수 있었을까요?
분명 예수가 거창한 휴머니스트여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역사 안의 한 인간으로서 '자기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많은 것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기도 하지만
매 시간 하루 종일을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는데 사로잡혀 있는 것이 제일 문제인 것 같군요.
예수에게서 '된' 것이 나에게서 꼭 '안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예수에게서 이루어진 '구원' 나에게도 같이 이루어지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 바로 '믿음' 아닌가요?
정신과의사인 스캇펙이 사랑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많은 사람들이(바리새인 빼고) 예수에게 가면 예수께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시대의 세리나 창녀들이 어떻게 예수에게 갈 수 있었을까요?
분명 예수가 거창한 휴머니스트여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역사 안의 한 인간으로서 '자기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많은 것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기도 하지만
매 시간 하루 종일을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는데 사로잡혀 있는 것이 제일 문제인 것 같군요.
예수에게서 '된' 것이 나에게서 꼭 '안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예수에게서 이루어진 '구원' 나에게도 같이 이루어지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 바로 '믿음' 아닌가요?
'자기' 안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을 말씀하신 것 같은데
우리는 너무 '자신'에게 사로잡혀서 살면서
이웃은 '의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한 환자를 진료 하면서
'나'에게 너무 사로잡혀 있는 나를 보면서
집에까지 와서도 계속 제 마음이 힘들었던 하루를 보냈습니다.
거창하게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기 전에
자기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