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3일 성탄의 신비

조회 수 1988 추천 수 4 2008.12.22 23:35:04
||0||02008년 12월23일 성탄의 신비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는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10:40)

예수님은 야고보에게 좌우편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없다고 이르셨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능력이 있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건 조금 의아스럽습니다. 그 문장을 정확하게 읽으면 권한이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 자리가 이미 결정된 것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또는 그 자리는 그것에 적합한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자신을 제한하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런 부분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즉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하나님으로 믿는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의 현실로 내려오셨습니다. 초월적인 능력을 포기하고 인간의 제한된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는 그렇게 무능력한 존재로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그가 철저하게 무능력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바로 그가 우리의 구세주이며, 재림주이며, 하나님이십니다.

몰트만의 명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바로 그 사실을 신학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곧 하나님의 처형입니다. 예수의 무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무능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자리한 그 낮은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낮은 곳이 바로 가장 높은 곳이 되었으며, 무능력이 바로 최고의 능력이 되었다는 역사의 신비를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탄절을 바로 앞두고 있습니다. 그 날은 바로 성육신의 신비가 이 세상에 발생한 날입니다. 말구유는 십자가의 실패와 부활의 승리가 준비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런 역설이 우리의 삶에서 참된 능력입니다. 성탄의 신비가 여러분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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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바람

2008.12.23 08:50:09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엊그제 설교제목과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오늘 큐티를 통해
그 어느때 보다 성탄의 의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이, 실체적으로 다가옵니다. 감사~
정목사님 다비안 모두 해피 크리스마스!

[레벨:4]알고파

2008.12.23 23:06:36

전통적인 '대속적'의미의 십자가 이해를 넘어서는
허무와 무의미의 극복으로서의 '십자가'가 더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반쯤 읽다가 포기했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어떨지..
일단 책 부터 시키고 봤습니다..^^(방금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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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12.23 23:30:47

하늘바람 님,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치욕의 초월이라는 이 구원 사건의 신비로
함께 들어가 봅시다.
좋은 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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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12.23 23:33:55

알고파 님,
대속이라는 전통적 의미와
무의미의 극복이라는 현대적 의미가 상충되는 게 아니랍니다.
무의미의 극복이 구원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무의미가 극복되는가 하는 건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하는 길을 말하지요.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는
<희망의 신학>보다는 조금 더 따라잡기 쉬울 겁니다.
그가 나중에 쓴 책이거든요.
성탄절의 평화가!

[레벨:4]알고파

2008.12.24 08:29:20

목사님,
제가 이해하고 있기는 '대속적'이란 의미는
안셀무스의 '대속'
즉, 인간의 죄(무한의 책임)와 신의 희생(무한의 책임)이
바꾸어진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구요..
그 '대속'에 대해서 '나'는 세례의 의미가 되는 '예수와의 일치' 보다는
그 '피'의 혜택을 보는 대상자로 다가옵니다.
'무의미의 극복'은 한 인간인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역사 안에 실재하게 하셨고
그 예수와의 일치(그리스도 운명에의 참여)로
'나'의 실패와 비참과 허무가 극복되는 '실존적'의미로
이해하고 있는데..
제가 '대속'의 이미를 너무 좁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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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12.24 10:03:06

예, 대속의 의미를 너무 좁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안셀무스의 대속론을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런 학자들이 거기에 도달하게 된 과정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구원이 인간에게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구원은 곧 죄로부터의 해방이지요.
죄는 자기 집중, 자기 애, 자기 연민이구요.
이게 죽을 때까지 불가능한 인간의 숙명인데요.
하나님만이 그걸 용서할 수 있다는 거지요.
물론 이런 주장이 극단에 이르면
배상만족설에 이르게 되는데요.
조금 희화적이긴 하지만
완전히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이런 주장이 나온 그 시대적 상황을 좀 감안해서 생각해야겠지요.
어쨌든지 기독교 교리도 아진 완결된 게 아니니
기독교 전통에 근거해서 끊임없이 해석학적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성탄의 기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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