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6일 예수 영접(3)

조회 수 1821 추천 수 4 2008.09.25 23:35:24
2008년 9월26일 예수 영접(3)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저는 어제 “보냄을 받았다.”는 진술의 신학적 의미를 조금 살폈습니다. 이런 묵상의 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변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그런 설명을 한 이유는 이런 기회에서 우리가 성서와 교리의 현실 안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 훈련이 없으면 성서와 교리를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일 위험성이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어제 묵상의 결론은 예수의 하나님 경험에 근거한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가 “보내신 이”에 대한 해석학적 중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근거해서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일치와 차이입니다. 여기서는 일치보다 차이를 설명하는 게 필요할 것 같군요. 일치는 잘 알려져 있기도 하고, 차이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일치의 신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으로, 즉 신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초월적이고 무소불위한 그런 신의 속성을 지닌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빌립보가 말하듯이 그는 오히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포기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하나님과 일치되었습니다.

위의 설명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예수는 공생애 중에 초자연적 능력이 많이 행사했다고 말입니다. 이 문제는 일치와 차이라는 주제와는 직접 연관되지 않으니까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 놓인 틈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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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8.09.26 00:44:14

얼마 전부터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묵상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주제 안으로 한발짝 더 들어 갈
능력이 없었 건만
오늘 조금씩 물꼬를 터 주십니다
예수가 신의 속성을 지닌 분이 아니라는 것,
무소불위의 신적 능력 없이 이 땅에 피조물의 형상으로 오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기 포기'로 표현 해도 될까요?
인간을 향한 그분의 사랑의 의지가
신으로서의 능력을 포기하기까지,
피조물과의 존재론적 일치에까지
적극적인 자기포기를 이루신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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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2008.09.26 06:54:46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 놓인 틈...!
이 간격이 그 예수를 따르려는 나와 예수의 간격만큼이나 까마득했을까요.
철저하게 인간으로 오신 예수가 어떻게 까마득한
하나님과의 간극을 뛰어 넘어 일치를 이루었을까요...?
목사님 저는 아직도 이런 부분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묵상을 대할수록
신의 속성을 지니지 않은 인간 예수에게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의 속성만 갖춘 완벽한 분이었다면 싱거웠을 겁니다.

[레벨:0]청개구리

2008.09.26 10:20:21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간극이 아리우스 이단 논쟁을 상기시키는군요
신학적 결론의 다름이 많은 생명을 앗아간 비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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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26 11:55:37

시와그림의 글이
어느 사이에 고도의 신학훈련을 거친 사람의 그것처럼 되었소이다.
문제는 자기가 진술하고 있는 그 내용을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지에 있겠지요.
'어느 정도'라는 부사를 잘 보세요.
똑같은 단어를 쓴다고 해도 그 깊이의 정도는 다 다르거든요.
이 말은 동시에 그 정도에 끝이 없다는 겁니다.
마치 현대 물리학에 끝이 없듯이요.
끝이 있다면 우리의 영성은 곧 경직되고 말아요,
일종의 영성의 매너리즘이지요.
시와그림 님이 여기 묵상 코너의 수제가 되셨군.
늦게 된 자가 먼저 된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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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26 12:05:46

김혜란 님이 여전히 느끼는 혼란의 근거는
신학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지 않은 분이
신학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다는 데에 놓여 있답니다.
그런 혼란을 모면하려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해요.
1. 신학적인 사유를 포기한다.
2. 신학의 세계로 들어간다.
1은 싫고
2는 불가능하지요?
그러면 혼란을 계속 안고 살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있어요.
이걸 말하기 위해서 에둘러왔어요.
그 혼란이 중요하답니다.
혼란이 바로 영성이에요.
신학의 대가들 있지요?
영성의 대가들고 포함해서요.
그들로 그런 혼란을 느꼈답니다.
그런 혼란에서 실마리를 찾는 동기가 주어지는 거지요.
기독론의 핵심이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틈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천천히 더 생각해보세요.
그날이 오면,
약간이라도 안개가 걷히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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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26 12:07:53

청개구리 님의 콤멘트는 무슨 뜻인지 정확하지 않아서,
저도 더 이상은 노 콤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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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08.09.26 15:52:16

목사님,
저는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봤는데요.
하나님께서 예수님 부활전까진 그 분의 신성을 철저하게 감춰 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성경기자들이 '그 분이 영광의 본체이셨으나 죽기까지 낮아지셨다'고 고백하신 것은
부활후의 예수님을 뵙고 난 후에의 일이니까요.
저는 제자들이 생전의 예수님을 랍비로, 혁명가로 밖에 따를 수 없었다는 생각을 요즘에 들어서 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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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8.09.26 16:49:43

글을 올려 놓고 보니
너무 주제넘은 표현만 쓴 것 같아
지울까 망설 였었습니다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답 해 주실 것 같아 내심 기다렸습니다
지우지 않길 잘했군요!
질문에 대한 즉답을 넘어
그 다음 묵상의 방향까지 잡아 주시니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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