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9일 지옥(1)

조회 수 2542 추천 수 5 2008.10.08 23:11:14
2008년 10월9일 지옥(1)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손을 찍어버리라는 43절, 발을 찍어버리라는 45절, 그리고 눈을 빼버리라는 47절은 지옥(게헨나)에 떨어질 운명을 영생과 대립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제 48절에서 지옥에 대한 묘사가 한 번 더 등장합니다. 구더기가 죽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지 않는 구더기를 상상해보십시오. 그것들과 붙어서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 인간의 파멸을 가리킵니다. 지옥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곳인가 하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을 상상해보십시오. 우리를 추위에서 보호해주는 불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들어가 있어야 할지도 모를 불입니다. 이것도 역시 죽지 않는 구더기와 마찬가지도 인간이 파멸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끔찍스러운 벌레와 불의 표상은 원래 유대교에 잘 알려진 것이라고 합니다.(집회서 7:17, 유딧 16:21) 마가복음 기자는 이런 표상을 인용해서 자신의 메시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병행구인 마태 18:8,9절은 구더기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연자 맷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누가 17:1,2절은 이런 지옥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습니다.

벌레와 불을 지옥 표상으로 다루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대인들에게는 가장 끔찍스러운 상황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절을 놓고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이들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그런 설교를 듣고 두려움에 떱니다.

이런 방식의 성서이해는 성서언어에 연루된 두 가지 해석학적 지평을 놓치는 데서 연유합니다. 첫째, 성서언어는 궁극적인 실질(ultimate reality)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둘째, 성서언어는 고대인들의 세계표상을 그 틀로 합니다. 전자는 보이지 않고, 후자는 보입니다. 후자를 통해서 전자를 향하는 게 성서해석입니다.

[레벨:3]광야

2008.10.09 14:40:46

저는 10여년전 삼육대학(안식일교회)의 신계훈 박사가 쓴 "오직 성경만이 판단기준이다."라는
책을 통하여 지옥의 개념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당황하였습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저의 신앙에 혼돈이 찾아왔습니다.
이 책에서는 지옥이라는 처소와 실체는 없는 것이고, 지옥은 말 그대로 인간이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다만, 성경에서는 지옥을 몇 가지로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과 영생 즉 천국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안식교리의 다른 교리는 제가 잘 모르고 이해도 안갑니다만
영생과 지옥에 대한 설명은 저의 뇌리가운데 오래도록 각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한테 말할 수 없고 질의할 수 없는 사항이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좀 더 깊이 알고 싶은 생각은 지울수가 없었습니다.
이 문제는 최근에 알게된 칼바르트의 만인구원론, 몰트만의 만유구원론과는 또 다른
구원(지옥)의 개념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인문학적 성서공부 입장에서 그리고 오늘 큐티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한
내용을 이해하고보니 제가 생각했던 안식일교회의 지옥에 대한 개념이
정목사님의 설명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짧은 소견으로 안식일교회의
교리관계를 반대하거나 동일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기회를 삼아
목사님의 견해와 입장을 들어보고자 함입니다.
참고로 제가 예전에 보았던 책의 일부를 요약정리하여 올려봅니다.

1. 죄의 결과인 죽음 - 둘째 사망
□ 예수재림시 인간의 몸은 죽음에서 부활한다.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살아 날 것이다.
여기에서 의인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변화된 새 몸을 입고(살전 4:15-18, 고전 15:51-54) 그리스도와 천 년동안 악인을 심판하는 권세를 받고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계20:406)
천년 후에 그리스도와 새 예루살렘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올 때 모든 죽은 악인의 둘째 부활이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백보좌 심판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악인을 소멸하여 영원히 멸망시키는 󰡒둘째 사망󰡒 곧 󰡓불못󰡓이 있을 것이다.(계 20:7-15) 죄인과 사탄을 멸한 후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할 것이다.

□ 그러면 죄의 결과인 죽음이 어떻게 둘째 사망에 이르는가?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살인자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너희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그만 사단의 거짓말을 믿었다. 그리고 결국 죽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사람들의 영혼은 불사불멸한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셨다. 다음의 말씀들을 비교하고 확인하여 죄의 결과는 사망임을 확인할 수 있다.
ᄋ 창 2: 17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ᄋ 겔 18:3 󰡒범죄하는 그 영혼(네퓌쉬)이 죽으리라󰡓
ᄋ 요 3:16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ᄋ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ᄋ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ᄋ 계 20:14 󰡒사망과 음부(무덤)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죄의 삯은 사망임을 일관되게 확언하고 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인 것처럼 영원히 죽는 것은 사망이다. 만약 죄인이 지옥에서 고통당한다면, 그것은 고생과 고통이지 사망은 아니다. 그것은 죄의 값이 사망대신 고생(고통)이란 뜻으로 성경을 바꾸어 놓는 일이다.
위에 인용된 계시록 20:14절의 둘째 사망이란 무엇인가? 신,구약성경은 의인이건 악인이건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게 마련인 생물학적 육체의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신31:16, 단 12:2, 욥 14:12,요 11:11, 행 7:60, 살전 415-16, 벧후3:3, 왕상 11:43등 영왕기, 역대기에만 35회 이상 표현됨) 이처럼 의인이나 악인이나 부활의 날까지 무의식 상태로 무덤에 머무는 것을 첫째 사망이라고 한다.

□ 자는 사람은 비록 의식은 없지만 분명히 깨어나는 것처럼 의인은 예수 재림시에 󰡒생명의 부활󰡓 곧 󰡒첫째 부활󰡓때에 육신으로 부활한다.(요 5:29, 계 20:5,6) 그러나 악인은 예수재림 천년 후(계20:5) 곧 둘째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한 죽음인 󰡒둘째 사망󰡒(계20:6,14)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사망과 음부(무덤)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인 지옥불인 것이다. 이 둘째 사망 때에 사망도 사망하여 사망의 끝에 이르는 것이다.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말은 아직도 사망이 끝나지 않았다는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2. 지옥의 진상
□ 일반적으로 개신교회에서는 잘못된 신학 理論과 성경의 誤譯으로 악인은 영원히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이론을 주장한다. 이 이론의 근거는 지옥을 뜻한다는 성경의 󰡒게헨나󰡓가 영원한 지옥불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시 계시록 14장 11절의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표현을 들어 지옥불 속에서의 악인의 고통도 영원하다는 논거를 삼고 있다.

□ 천국을 인정하듯이 일반적으로 지옥을 부인하지 않지만, 문제는 지옥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고, 언제 있을 것이며, 얼마나 오래 있을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地獄의 본래 뜻부터 확인하여 볼 필요가 있다.
지옥을 영어로는 헬(hell)이라고 하는데 흠정역(KJV) 구약성경에 31번, 신약성경에 23번 나타난다. 그런데 성경에서 지옥으로 번역된 이상의 표현들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표현에서 나왔다. 그것들을 일일이 점검하며 참으로 성경이 말하는 지옥이 어떠한가를 그 진상을 확인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3. 성경에 나타난 지옥(hell)의 용어들
□ 구약성경의 음부 - 󰡒스올󰡓(sheol)
구약성경에 65번 쓰여진 󰡒스올(sheol)󰡓이라는 히브리어는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를 뜻하는 용어이다. 우리 말 성경에는 주로 陰府로 번역하여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잘못 생각하는 저승을 연상시킨다.
17세기 영어번역인 흠정역(1611, KJV)에는 같은 말을 자신들의 주관에 따라 31번은 무덤으로, 31번은 地獄으로, 3번은 구덩이로 번역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더 많은 연구를 거쳐 번역된 영어 성경들은 地獄이 문맥과 神學에 맞지 않지않게 되자 미국 표준역(ASV)의 경우 대부분이 원어인 스올을 그대로 썼고, 새국제역(NIV)은 대부분 地獄대신 무덤으로 번역하여 신학적 양심을 되찾고 있다.

성경 본문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음부로 번역된 이 스올이란 곳은 사람이 죽으면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가게되는 幽宅 곧 무덤을 뜻했음을 알 수 있다.(욥 7:9, 시30:3, 전 9:10, 창37:35, 42,38, 44:29,31, 욥 144;13, 17:13-16, 시 18:4, 5:30,3:49, 49:15, 사38:10, 시 16:10→행 2:27,31, 미 16:33, 겔 32:18-23, 사14:9, 시 9:17, 계20:13)
히브리어 스올이 구약성경에서 지옥이나 음부로 잘못 번역되기는 했지만 그곳이 악인이 죽은 뒤 불 속에서 고통당하는 지옥의 뜻으로 쓰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에는 악인을 영원히 불태우는 그런 지옥은 용어 마져도 없다. 그러면 신약 성경에서는 어떠한가?

□ 신약성경의 음부 - 󰡒하데스󰡒
신약성경에 지옥(hell)이라고 번역된 말이 모두 23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10번은 󰡒하데스󰡒에서, 12번은 󰡓게헨나󰡒에서, 1번은 󰡓타르타루스󰡒 등 세 가지 헬라어에서 나왔다.
먼저 하데스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스올에 해당하는 헬라어임을 시편 16:10절을 인용한 행2:27절에 알 수 있다. 그것이 모두 다윗이나 예수님이 장사된 무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소아시아 무덤들 앞에 󰡒ᄋᄋᄋ의 무덤󰡓이라고 쓴 묘비에도 무덤을 뜻하는 헬라어인 하데스를 썼음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자주 지옥으로 번역된 신약성경의 헬라어 하데스는 죽은 악인들의 영혼이 고통당하는 불타는 지옥이 아니라, 죽으면 모두 가게 되는 무덤이나 죽음 자체를 뜻했음을 성경본문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영어번역 성경인 흠정역(KJV) 등 하데스를 대부분 지옥으로 번역했던 옛날 성경과는 달리 20세기 새 번역 성경들은 그것을 무덤 혹은 원어 그대로 하데스를 써서 지옥으로 번역할 때 생기는 문맥과 신학상의 혼란을 피하고 있다. 어떤 신학자는 스올이나 하데스가 지옥도 아니고 무덤도 아닌 곳으로 의인과 악인의 영혼들이 최후의 심판이 있기까지 예비적인 평안이나 고통을 겪는 중간상태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본래 영어의 지옥인 헬(hell)이란 단어는 덮다(to cover), 숨다(to hide)라는 뜻의 앵글로색슨어인 헬란(helan)에서 나온 것이다. 수 백년 전에는 그 낱말이 앞에서 살펴본 히브리어 스올(sheol)이나 헬라어 하데스(hades)처럼 죽으면 누구나 보이지 않는 곳인 무덤을 뜻했다.

□ 어두운 구덩이 - 󰡒타르타루스󰡓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또 다른 헬라어인 󰡒타르타루스(tartarus)"는 벧후 2:4절에 단 한번 󰡓하나님이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에서 󰡓지옥에 던져󰡒로 번역된 헬라어의 동사형으로 나타난다. 명사인 󰡓타르타루스󰡓는 어두운 구덩이의 뜻으로 쓰였는데 유다서 1:6절에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라고 썼다. 그러면 범죄한 악한 천사들을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놓은 이 흑암의 구렁텅이는 어디인가? 요한계시록에 그 해답이 있다. 범죄함으로 하늘에서 추방당한 사단과 그를 따르는 악한 천사들은 󰡒하늘에서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땅으로 내어 쫒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어 쫒기니라󰡓(계12:8,9,12,13).
실제로 이 땅은 재림후 최후의 심판이 집행되기까지 천년동안 사단이 갇혀있을 혼돈 상태인 󰡒무저갱󰡓으로 묘사되었다(계20:1-3). 그러므로 비록 지옥으로 번역되었다해도 그것이 악인이 영원히 불살라지는 그런 뜻의 지옥일 수 없음이 분명하다.

□ 신약성경의 지옥 - 󰡒게헨나󰡓
신약성경에 󰡒지옥󰡓으로 가장 많이 번역된 󰡒게헨나(gehenna)"는 12번 나타나는데 헬라어로는 󰡓게엔나(geenna)"로 불리운다.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ge)"와 󰡒힌놈(Hinnom)󰡓이 합성된 󰡒힌놈의 골짜기󰡓란 뜻의 地名이다(수18:16). 12번 가운데 9번은 󰡒지옥(hell)󰡒이란 명사로, 3번은 형용사로 쓰였는데 한 번(약3:6)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사용하신 특이한 표현이다. 이 󰡓게헨나󰡓만이 불타고 있는 성경적인 배경의 지옥을 묘사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게헨나󰡓는 어디이며, 타오르는 불은 언제 그리고 언제까지 타오를 것인가?

지옥의 주소로 소개된 󰡒게헨나󰡓는 다름아닌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져 타락이 극도에 달했을 때, 이곳에서 자식들을 몰렉신에게 불살라 제사하기까지 한 배도의 현장이었다(대하28:1-3, 33:1-6; 왕하23:10). 예레미야는 이 골짜기를 󰡒살륙의 골짜기󰡓라 칭할 것임을 예고하고, 배도한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것이나 그것을 쫒을 자가 없을 것이며 땅이 황폐하리라󰡓고 예언했다(렘7:31-34; 19:2,6; 32:35).

실제로 요시야 왕은 그 골짜기를 그렇게 만들었다(왕하23:10). 후에는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와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곳이 되어, 이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고 있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힌놈의 골짜기󰡓, 곧 󰡒게헨나󰡓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을 곳을 상징하기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적용하여 자신의 말씀을 한사코 거역하는 바리새인들과 완악한 인간들을 책망하시며 그들이 마지막 심판날에 󰡒살륙의 골짜기󰡓 곧 󰡒게헨나󰡓에 던져질 것을 경고하셨다(막9:47). 그러므로 예수께서 묘사하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이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막9:43, 48)󰡓 지옥불은 곧 󰡒힌놈의 골짜기󰡓의 쓰레기와 시체를 태우는 불이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10.09 19:17:46

광야 님,
긴글을 인용하셨군요.
신계훈 박사님의 주장에는 별로 틀린 게 없을 겁니다.
내가 꼼꼼하게 살피지 않아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요.
"성서만이 기준이다."라는 원칙도 맞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단서가 전제되어야 한답니다.
1. 모든 기독교 교리를 성서에서 추출해낼 수 없습니다.
즉 성서가 완료된 대답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서만을 문자적으로 추적해서 답을 찾으려는 안식일 교회의 특징 상
아마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을걸요?
2. 모든 성서는 해석되어야 합니다.
성서 자체가 그 시대의 해석이니까 이건 긴 설명 없이 분명한 겁니다.
안식일 교회는 아마 성서를 해석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추종하고 말지요.
그래서 토요일에 모여서 에배를 드리는 거에요.

이런 전제에서 본다면 신계훈 박사가 말하는 지옥에 대한 설명,
그 설명을 위한 성서인용도 아마 아전인수가 적지 않을 겁니다.
이를 확인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지요?
감사.

[레벨:3]광야

2008.10.10 10:42:16

정목사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자상하고 친절한 답변에 청강생정도인 제가
배우고자하는 마음이 앞질러 본의 아니게 자주 질문을 던진 것 같습니다.
이젠 섣부른 몸짓을 접고 기다림으로 묵상하면서 깨우치는
노력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아둔함과 무지함의 소치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질문하는
것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지난달엔 희망의 신학을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 이교수님에게
전화로 묻기도 했는데 이런 것이 조급한 저의 성정탓인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하다가 그래도 안되면 또 질문을 드릴지 모르겠지만,
이해의 인내심을 배우며 공부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좋은 주말되시고,
목사님의 샘터교회 주일메시지를 잘 전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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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4일 이혼증서(1)

  • 2008-10-23
  • 조회 수 2001

2008년 10월24일 이혼증서(1)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막 10:4)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절의 말씀으로 예수님에게 대답했습니다. 그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이혼증서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기 전에 신명기의 내용이 실제로 모세의 가르침인지에 대해서 먼저 짚겠습니다. 우리가 성서텍스트를 어떻게 대해야 하...

10월23일 역사비평에 대해

  • 2008-10-22
  • 조회 수 1818

2008년 10월23일 역사비평에 대해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막 10:3) 예수님은 이혼 운운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모세의 가르침이 뭐냐고 되물었습니다. 이것도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하신 말씀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옆으로 나가는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비슷한 유형의 질문과 대답이 예수의 공생애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일까요?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정...

10월22일 물음의 이중성 [3]

  • 200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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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22일 물음의 이중성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막 10: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가?” 아무런 전이해 없이 이 질문만 본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내를 버리는 게 옳을 리가 없지요. 이렇게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것은 여기에 어떤 속사연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우선 이 물음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하는 질문과(막 12:14) 비슷한 맥락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 자체에 관심이 있었...

10월21일 신앙의 눈 [2]

  • 200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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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21일 신앙의 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막 10:1) 마가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제 가버나움을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내려가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장 짧은 도표로 만든다면, 가버나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가시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고 보면 됩니다. 그 기간을 보통 3년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건 아닙니다. 길게 잡아서 대략 2년여, 짧게 잡아서 1년 ...

10월20일 제자 정체성 [7]

  • 2008-10-19
  • 조회 수 1890

2008년 10월20일 제자 정체성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50절에서 글의 흐름이 완전히 바뀐 것처럼 보입니다. 지옥, 구더기, 불이 49절에서 소금과 연결되더니 이제 소금의 짠 맛과 화목 하라는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옥 운운은 결국 화목을 가르치기 위한 서론이었을까요? 우리는 이 대목을 제자의 정체성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막 9:33절 이하에서 “누가 크냐?” 하는 제자들의 논...

10월19일 불과 소금

  • 2008-10-18
  • 조회 수 4308

2008년 10월19일 불과 소금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9) 그냥 눈에 들어오는 대로만 본다면 49절은 48절에 대한 부연설명 같습니다. 48절은 지옥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했으며, 49절은 사람이 불로써 소금 치듯 당하게 된다고 했으니, 그렇게 이해 할만도 합니다. 그러나 내일 묵상하게 될 50절과 연결해서 보면 이상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소금의 맛을 유지하고 서로 화목 하라는 가르침과 소금을 치는 듯한 지옥불의 연단은 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일...

10월18일 지옥(10) [6]

  • 2008-10-17
  • 조회 수 2101

2008년 10월18일 지옥(10)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루터는 지옥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지옥을 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지옥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구더기와 불로 표상되는 지옥의 두려움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면 그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모독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생명’과 직결됩니다. 루터가 지옥이라도 갈 수 있다고 말한 이유는 예수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질문이지만...

10월17일 지옥(9)

  • 2008-10-16
  • 조회 수 1486

2008년 10월17일 지옥(9)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지옥의 두려움을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도 듣기에 따라서 일리가 있긴 합니다. 지옥의 두려움이 전혀 없다면 사람들이 방탕한 삶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태를 좀더 냉철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지옥의 두려움을 불어넣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죄악에서 돌아선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건 사형제도가 있다고 해서 범죄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는 사실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예수님이 지옥을 사실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지옥을, 그 두...

10월16일 지옥(8) [4]

  • 2008-10-15
  • 조회 수 1920

2008년 10월16일 지옥(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독자들 중에서 어린이 주일학교에 관계된 분들이 있겠지요. 그런 분들에게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어린이들을 지옥 교리로 위협하지 말아야합니다. 이건 어린이만이 아니라 청소년들이나, 또는 그들과 비슷한 정신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겠군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지옥의 두려움을 알게 하고, 그런 두려움으로라도 평생 예수를 잘 믿고 착하게 살도록 하면 좋은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건...

10월15일 지옥(7) [2]

  • 2008-10-14
  • 조회 수 1750

2008년 10월15일 지옥(7)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구성적인 요소와 그렇지 않은 요소를 구별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이런 짧은 묵상의 글로 이런 문제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조금 경솔합니다. 짧게 글을 쓰다보면 비약되는 부분이 적지 않아서 논리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마무리는 해야겠습니다. 이 맥락에서 핵심은 기독교 교리가 매우 긴 과정을 통해서 완성...

10월14일 지옥(6)

  • 2008-10-13
  • 조회 수 1484

2008년 10월14일 지옥(6)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어제 말씀드린 원죄 개념이 우리의 묵상 주제인 지옥과도 간접적으로 연결되니까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교부들이 원죄 개념을 주장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죄의 보편성에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이 죄의 마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적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인간에 의해서 처리될 수 없는 존재론적 능력이라는 말이 됩니다. 원죄 개념은 그것을 선악과 설화와 연결해...

10월13일 지옥(5) [4]

  • 2008-10-12
  • 조회 수 1838

2008년 10월13일 지옥(5)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사도신경은 주님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말할 뿐이지 사람들의 운명을 천당과 지옥으로 나눈다고 명시적으로 진술하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암시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성서와 신조가 어떤 것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어떤 것은 단지 암시적으로 언급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명시적인 언급은 기독교 신앙을 해명하는 자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본 토대이지만, 암시적 언급은 아직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은, ...

10월12일 지옥(4) [3]

  • 2008-10-11
  • 조회 수 1813

2008년 10월12일 지옥(4)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어제 묵상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쓰겠습니다. “그것을(인간의 지옥행) 단정적으로 선포하는 사람은 성서의 세계와 기독교 신앙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문장을 읽고 지옥을 부인하는군, 하고 생각할 분들이 없지 않겠지요. 그건 오해입니다. 저는 지옥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뿐입니다. 우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창조와 은총의 하나님께서 그 많은 영혼들을 영원히 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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