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170
10: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천사가 맹세합니다.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는 표현을 <새번역>은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새번역>이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할 종말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이를 신학 용어로 ‘임박한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이 곧 임박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으니 그 통치를 향해서 돌아서(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심판이 가까이 왔을 뿐이지 아직 온 것은 아니라고 보면 안 됩니다. 이미 온 것입니다. 다만 완료되지는 않았을 뿐입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개인의 인생살이에서 죽음이 일상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신학에서는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님’(not yet)의 변증법적 긴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 그 종말론적 심판이 어떻게 시작했으며, 어떻게 채워져서 완결되어야 하는지를 깨어 있는 영성으로 살피고 대처하고 기도해야겠지요.
이런 설명이 실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의 둘째 딸이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건 분명한 거 같은데,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느끼기는 힘들다는 겁니다. 불가시적 현실성(invisible reality)으로서의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경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비유적으로, 바람을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공기가 움직이면 바람 현상이 일어나고, 공기가 움직이지 않으면 바람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듯이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 전통은 하나님께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이름을 붙이면 하나님께서 그 이름에 한정되기 때문입니다. 엘로힘, 엘 샤다이, 야훼 등등,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이름은 그분의 존재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께 이름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슬람 전통이 하나님을 ‘알라’라 부른다고 해서 잘못은 아닙니다.
6절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수식이 재미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이’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신 이입니다. 그 안에 있는 ‘물건’까지 창조하신 이입니다. 물건이라는 번역은 매끄럽지 않습니다. 헬라어 τὰ에 대한 적합한 단어가 없으면 사물들(the things)이라고 하는 게 좋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이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불교도와 이슬람교도까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식물과 동물과 광물, 우리가 귀여워하는 강아지나 싫어하는 뱀도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존재는 곧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입니다. 요한의 신앙은 우주론적 차원까지 이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차원까지 나아가야 제대로 된 그리스도교 신앙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요. 이게 너무 먼 이야기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