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6일 부정의 길 (2)

조회 수 2152 추천 수 22 2006.11.16 07:59:18
2006년 11월16일 부정의 길 (2)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막 3:7)

매튜 폭스는 <원복>(Original Blessing, A Primer in Creation Spirituality)에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영성을 네 가지 구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Via Positiva(긍정의 길), Via Negativa(부정의 길), Via Creativa(창조의 길), Via Tranaformativa(변모의 길)이 그것입니다. 두 번째 구조인 비아 네가티바는 바로 무(無)를 받아들이는 영성, 즉 부정의 길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매튜 폭스의 진술과 그가 인용하고 있는 다른 영성주의자들의 진술을 여기에 다시 간추려서 인용하겠습니다.(원복, 158 쪽 이하에서)

만물이 무다, 매우 사소한 것이라거나 제법 어떤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저 무라는 말이다. 만물이 무에서 끌어내어졌고 따라서 그 기원은 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기꺼이 빨려 버리고 지워지고 말소되고 무가 되겠는가? 기꺼이 무가 되겠는가? 망각 속에 잠겨들겠는가? 아니라면 결코 참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렌스

무를 사랑하라, 자기를 달아나라
혼자 서라, 아무에게서도 도움을 찾지 말라
네 존재를 잠잠하게 하라, 모든 것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라
묶인 이들은 자유롭게 하라, 자유로운 이들에게 권고하라
앓는 이들을 돌보되, 혼자 머물라
슬픔의 잔을 마실 때는 사랑의 불을 켤지어다, 끈기의 성냥으로-
이것이 광야에 머무는 길이다 -막데부륵의 메히틸드

어둠아, 내가 나온 어둠아
세상에 울타리 친 모든 불보다 너를 더 사랑하다
불이 누구에게나 빛의 동그라미를 이루니
아무도 바깥에서 너를 알게 되는 이가 없다

그러나 어둠은 모든 것 안에서 끌어당긴다
꼴들과 불들, 동물들과 나 자신 안에서
얼마나 쉽게 모으는가 - 힘들과 사람들을!

그리고 큰 힘이 내게 다가올 수 있다

나는 밤을 믿는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서양 그리스도교 영성이 돼 거의 전적으로 타락/속량의 외투로 둘러싸이기에 만족하고 그리하여 신자들에게 진정한 비아 네가티바를 가르치지 못했는가? 이 절박한 물음을 면밀히 검토할 때 확실히 나올 수 있는 답인즉, 정치적으로 기성세력이 다양하게 누리는 이익에 진정한 비아 네가티바가 기여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오히려 기성세력은 비아 네가티바의 심오한 개인적, 사회적 의미를, 우리네 가장 깊은 자아의 사회적 가치를 재창조하는 것을 외면했다. -매튜 폭스

[레벨:7]늘오늘

2006.11.16 13:35:09

햇볕 밝은 편 길로 걷다가,
햇볕 맑은 쪽 벤치에 앉아,
눈부신 햇살에 내 눈을 감고,
눈감아도 보이는 따뜻한 귀엣말,,,

내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운행,
저기 저 비둘기나, 나나,
멈춰있습니다.

평온히 재잘거리는
침묵 속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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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7일 열두 제자 (8)

  • 2006-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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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7일 열두 제자 (8)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막 3:16) 열두 제자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거명된 사람은 역시 시몬 베드로입니다. 원래의 이름은 시몬인데, 예수님이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보태주었습니다. 마태복음의 전승에 따르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시몬의 신앙고백이 있을 후에 예수님이 그에게 이런 이름을 주셨다고 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는 예수님의 말씀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12월6일 열두 제자 (7)

  • 200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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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6일 열두 제자 (7)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5) 어제 설명한 전도와 축귀 능력은 일단 구별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똑같습니다. 이 양자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 변증되어야 하고, 동시에 축귀의 능력으로 증명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가까이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그 능력에 사로잡히신 분이었습니다. 복음서의 비유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한 것입니다. 네 종...

12월5일 열두 제자 (6)

  • 200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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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5일 열두 제자 (6)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5)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두 번째 사명은 “귀신을 내쫓는 권능”이었습니다. 첫 번째 사명인 전도와 두 번째인 축귀의 권능은 약간 성격이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라면, 축귀는 악한 영을 내쫓는 능력입니다. 전자는 그야말로 사명이고, 후자는 권한일지 모릅니다. 전자는 언어의 세계이고, 후자는 능력의 세계입니다. 전자를 논리라고 한다면, 후자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

12월4일 열두 제자 (5)

  • 2006-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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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4일 열두 제자 (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예수님이 제자들을 밖으로 내보낼 때 맡긴 구체적인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도”입니다. 우리말 성서에 “전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케뤼소”는 proclaim, make known, preach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what is preached, message, proclamation이라는 뜻의 “케뤼그마”와 이웃지간이기도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전도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임했다고 하는 사실을 전하는 ...

12월3일 열두 제자 (4) [2]

  • 2006-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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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3일 열두 제자 (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어제 저는 예수님과 존재론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먼데 있지 않습니다. 존재를 우리가 외면하면서 살아가는데 매우 익숙해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일상과 온 우주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별로 감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여기에”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그 은총이 존재하고 있다...

12월2일 열두 제자 (3) [1]

  • 2006-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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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2일 열두 제자 (3)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열두 제자에게 부여된 사명은 우선 예수님 곁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는 마가의 표현은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저자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수도 있겠지요. 본문의 맥락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큐티의 차원에서 이 진술의 의미를 한번 짚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

12월1일 열두 제자 (2) [1]

  • 2006-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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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1일 열두 제자 (2)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하필이면 열두 명일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들에게 12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열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열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 뿌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전승에 따라서 열두 지파의 분류가 약간씩 다릅니다. 거기에는 레위 지파와 요셉 지파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원래대로 한다면 레위와 요셉이 당연히 열두 지파에 ...

11월30일 열두 제자 (1)

  • 2006-11-30
  • 조회 수 2290

2006년 11월30일 열두 제자 (1)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막 3:13) 막 3:13-19절은 열두 제자를 부르고, 사명을 주신 사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들이 바로 열두 사도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열두 제자, 또는 열두 사도에 대한 내용도 복음서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납니다. 그런 건 조금 복잡하고, 현재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접어두기로 하지요. 우선 예수님이 왜 제자들을 부르셨는지 잠시 생각해보시죠. 이 문제와 연관해서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습니...

11월29일 자기 은폐

  • 200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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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29일 자기 은폐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막 3:12) 예수님은 귀신들의 외침을 듣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습니다. 누구에게 경고한 걸까요? 귀신처럼 행동하고 있는 병자들인가요, 제자들인가요? 아니면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인가요? 어쨌거나 예수님은 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경고하신 걸까요? 큐티는 신학적인 문제로 들어가기보다는 우리의 삶에 교훈되는 것을 찾는 공부인데, 저는 습관적으로 신학적인 쪽으로 끌고 갑니다. 못된 버릇이네요....

11월28일 더러운 귀신 (3)

  • 2006-11-28
  • 조회 수 2281

2006년 11월28일 더러운 귀신 (3)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막 3:11)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귀신들의 진술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런 구절을 만나면 저도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일단 이 장면을 냉정하게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서 갈릴리 호숫가로 물러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대개 병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도 만지려고 밀려드는 그들을 예수님은 피하려고 하셨습니다....

11월27일 더러운 귀신 (2) [1]

  • 2006-11-27
  • 조회 수 2555

2006년 11월27일 더러운 귀신 (2)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막 3:11) 간혹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은 귀신의 실체를 믿습니까?”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전이해가 필요합니다. 만약 귀신을 악한 기운이라고 말한다면 귀신의 작용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런 작용을 명백하게 목도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일일이 그걸 여기서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알만한 분들은 알고 있겠지요.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11월26일 더러운 귀신 (1) [3]

  • 2006-11-26
  • 조회 수 2774

2006년 11월26일 더러운 귀신 (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막 3:11) 오늘 본문보도에 따르면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으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앞에서 등장한 병자들과 귀신의 활동은 긴밀히 연관됩니다. 성서시대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온갖 질병의 원인을 귀신의 활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귀신을 실체로 이해했다는 걸 크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이런 문제를 그들의 ...

11월25일 병자 (5)

  • 2006-11-25
  • 조회 수 2589

2006년 11월25일 병자 (5)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10)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고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왔다고 합니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에게서 몸과 마음의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하는 중입니다. 재미삼아 이런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병든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그곳에는 병이 없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병이 없다면 건강이 실감이 날까요? 아파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건강...

11월24일 병자 (4) [3]

  • 2006-11-24
  • 조회 수 2563

2006년 11월24일 병자 (4)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10) 어제 저는 한미 FTA 체결로 인한 미국 의료시스템에 대해서 한 마디 했습니다. 미국의 의료보험이 다원화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래서 빈곤층이 의료 사각지대라는 정도는 알고 있지만 자세한 건 잘 모릅니다. 제가 독일에 잠시 있었기 때문에 그쪽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복지에 관한한 미국보다는 유럽 나라들이 훨씬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스웨덴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세계 모든 나라가 부러워하는 ...

11월23일 병자 (3)

  • 2006-11-23
  • 조회 수 2165

2006년 11월23일 병자 (3)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10) 병 치료는 거룩한 구원행위입니다. 이런 점에서 의사도 역시 목사요 사제입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생명에 자기 실존을 건 사람들입니다. 목회와 의료행위는 생명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경제논리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생명이 거룩하다면 그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의 행위도 역시 거룩하니까요. <기독교사상> 11월호 포지인물로 장기려(1911-1995) 박사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 살...

11월22일 병자 (2)

  • 2006-11-22
  • 조회 수 2316

2006년 11월22일 병자 (2)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10)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몰려왔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기만 해도 혹시 병이 치료되지 않겠나 하는 다급한 심정이 있었겠지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처럼 병은, 특별히 지병이나 불치병은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습니다. 제가 현풍에서 목회할 때 50대 후반쯤 되는 가장이 폐암에 걸린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과 자녀들만 교회...

11월21일 병자 (1) [6]

  • 2006-11-21
  • 조회 수 2580

2006년 11월21일 병자 (1)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10) 예수님에게 몰려온 사람들은 대개 병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겠지요. 우리가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여러 번 확인했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일중에서 병자 치유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이 병으로 인해서 당한 고통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이런 치유행위는 당연합니다. 그것은 곧 몸의 구원이기도 합니다. 병이 무엇일까요? 가장 간단하고 흔한...

11월20일 피하시는 예수

  • 2006-11-20
  • 조회 수 2344

2006년 11월20일 피하시는 예수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막 3:9) 오늘 본문의 장면은 한편의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쌉니다. 인기가 많은 정치인이나 가수, 또는 탤런트와 운동선수들이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이는 모습과 비슷한 그림입니다. 이럴 때는 누구나 기분이 ‘짱’이기 마련입니다. 이런 맛에 정치를 하고, 노래도 부르는 게 아닐까요? 저 같은 목사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누구나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을 만나면...

11월19일 예수님의 일

  • 2006-11-19
  • 조회 수 2595

2006년 11월19일 예수님의 일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막 3:8) 많은 무리가 예수님에게 몰려온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큰) 일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주로 장애인과 질병 치유, 또는 안식일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다툰 것이나, 또는 몇몇 가르침들입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가장 타당한 대답은 이런 일련의 일들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

11월18일 많은 무리

  • 2006-11-18
  • 조회 수 2372

2006년 11월18일 많은 무리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막 3:8) 7절에 의하면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으며, 8절에 의하면 남쪽과 중부의 여러 지역에서도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나왔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거론되지 않았는데,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과 공생애 출발지인 갈릴리 호수 근방만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전체를 망라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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