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4일, 토
루터(10)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역설했다는 것은 당시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교황주의에 묶이고, 덕행주의에 묶였다. 오늘의 개신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신앙과 복음의 자유를 모른다. 자유를 오히려 두려워한다. 수많은 신앙 규범에 묶여 있다. 이런 데 묶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신앙 냉소주의에 떨어졌다. 다시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겠다.
<외적 행위와 자유>
더욱이 모든 종류의 행위를 배제하기 위해서는 정관(靜觀)과 명상과 또한 영혼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 역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단 한 가지만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의와 자유를 위해서 필요하다. 그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인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말씀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바와 같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요 11:25),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 4:4).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영혼은 자유로울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영혼의 자유가 전혀 확보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영혼은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 진리, 빛, 평화, 의, 구원, 기쁨, 자유, 지혜, 능력, 은총, 영광 및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축복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설교처럼 읽힐지도 모르겠다. 언어와 문자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저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 루터가 생각하는 것을 붙들어야 한다. 루터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중요하게 다루는 교회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리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권위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다. 루터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권위보다 상위개념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로서의 성경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다. 그 구원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났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사건이다. 예수를 통해서 루터는 생명, 진리, 평화, 의 등등을 경험할 수 있었다. 교회의 권위는 이런 것들을 제공하지 못한다. 오늘 한국교회 신자들 역시 신앙생활을 통해서 생명, 진리, 평화, 의를 경험하기보다는 교회 권위에 종속당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