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7일 죄인 (2)

조회 수 1653 추천 수 29 2006.09.17 20:43:24
2006년 9월17일 죄인 (2)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6)

죄인은 죄를 지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죄에 대한 인식이 강한 사람일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가 힘든 이유는 죄의 정의가 간단하지 않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실정법을 위반한 행위가 죄이며, 또는 한 사회의 전통과 관습을 어긴 행위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정법 자체가 절대적이지 않으면, 사회 관습 또한 상대적이라는 점에서 그것만으로 죄를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국가보안법은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기준입니다. 이 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심지어 생명을 잃었는지 모릅니다. 간통죄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법이라고 합니다. 독일의 아우토반(고속도로)은 무제한이지만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시속 100-120km를 넘으면 범칙금을 내야 합니다. 유럽에서는 자식이 성장하면 부모와의 관계가 사무적으로 바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죽을 때까지 끈끈한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에게는 효가 여전히 중요한 관습법입니다.
이런 문제만이 아니라 동일한 행위라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그 판단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반복적으로 구타당하던 여자가 남편을 살해했다고 합시다. 살인이기는 하지만 정상이 참작됩니다. 정당방위의 살인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욕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살인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이미 간음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 따른다면 표면적인 행동 이전에 내면적인 의식이 훨씬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이에 반해 세상의 법은 표면적인 것만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레벨:4]New York

2006.09.18 03:45:37

이 전 글에서 정목사님의 답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 저의 답글은 이렇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목사님의 언어를 빌려서 얘기하면 "이런 이중적인 상황"이라고 사고되는 그 기준에 너무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준은 이 문명이 가져온 오직뿐인 기준이라도 말입니다. 문명이라함은 수단과 방법이 목적이 되버린 이 문명을 지칭합니다; 가장 좋은 예가 돈이겠네요. 근본적으로 이중적인 즉, 삶과 죽음이라는 이중성, "우리는 사는 것만큼 죽습니다;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이 이중성을 깸을 역사하셨고 그리스도인이란 그러함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같음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며 즐거움입니다. 주님에서 멀어지면 그 책임은 짐으로 느껴지고 주님의 품에 항시 돌아갈 수 있으면 즐거움입니다.
조금 빠른 감이 있지만 질문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장난이나 그냥 한 번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이미 따먹었기에 죽음이란 저주를 받고, 남자는 일을 해야하고 여자는 산모의 고통을 겪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선악이라는 지식을 아직 도달해야할 목적인양 대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물론 자식들에게도 열정적으로 선악과를 먹입니다; 바로 그 선악과를 이미 가졌기에 죽음이라는 저주까지 받았는 데에 아직 도달해야할 목적인양 말입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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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9.19 07:49:17

뉴욕 님,
선악과 때문에 죽음이 들어오고, 노동과 출산의 고통이 임했다는 창세기의 보도는
일단 어떤 연역적인 진리가 아니라
귀납적인 해석이라는 점에서 그걸 절대화하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이 이 세계를 이해라는데
매우 소중한 관점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요.
다만 이 세계는 그런 방식으로는 해명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죽음도 역시 저주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그렇다고 행운도 아니구요.
그냥 우리의 현실이에요.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요.
그게 무엇인지는 나중에 밝혀지겠지요.
아직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식을 추구함으로 죽음을 맛본다는 말은
선악과 사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고대인들의 생각이 그렇다는 거죠.
그들이 그렇게 해석했다는 거죠.
죽음, 노동, 출산 등은 오늘 우리가 늘 새롭게 생각해야 할 주제들입니다.
과거의 해석이 묶일 필요는 없지만
그걸 부정할 필요도 없구요.
자기에게 열리는 것만큼 보면 되겠지요.
어쨌든
지식을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이 문제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진리이겠지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생명을 나누는가가 핵심이겠지요.
그러나 선악과 이후의 현실 세계에서
아무도 죽음을 떨칠 수 없듯이
자본주의 이후의 시대에 아무도 돈의 마력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어요.
계몽주의 이후로 아무도 지식 세계로부터 도망갈 수도 없어요.
이건 우리의 옵션이 아니라 운명입니다.
뉴욕 님의 말을 듣다보면
우리가 모두 갓난아이와 같은 영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처럼 들리는군요.
선과 악의 분간이 전혀 필요 없는 그런 상태요.
완전히 의존적인 그런 영성말입니다.
옳은 겁니다.
장차 그런 쪽으로 나가야겠지요.
도사들은 어린애가 되더군요.
우리는 이미 그런 어린아이의 시기를 지났습니다.
이 세상의 현실과 투쟁해야 할 정도로 자랐습니다.
물리학에 <불가역의 원리>처럼
이미 시간이 흐른다음에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품안에서 젖을 빠는 아이로 돌아갈 수 없어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뱀같은 지혜가 필요한 나이가 되었어요.
이런 지혜, 지식, 계몽, 합리 등등이 영원한 게 아니지만
이 현실 세계 안에 던져진 우리는 그걸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모든 세계의 비밀이 완전히 밝혀지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거죠.
그 이전까지 우리는 선악과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레벨:0]서우정

2006.09.20 22:12:51

내가 무엇을 바라리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정목사님의 글에 참 많은 공감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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