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9일 새 포도주 (2)

조회 수 2471 추천 수 29 2006.09.29 23:38:04
2006년 9월29일 새 포도주 (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막 2:22)

낡은 가죽 부대의 특징은 어제 말씀드린 대로 신축성과 탄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든지, 아니면 웬만한 충격을 자체적으로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해야만 가죽 부대는 견딜 수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결국 찢어지고 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여기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탄력성이 완전히 사라진 가죽 부대인가요? 아니면 어느 정도 늘어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가죽 부대인가?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전자에 가깝습니다. 자신과 약간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 속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타종교를 향해 상당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 강남대학교 기독교 학과 아무개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절에 가서 불교의식에 참여했고, 불교와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게 정확한 건지, 그리고 다른 속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것으로 대충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 대학교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종교재판처럼 일을 처리하는 건 그만큼 경직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스도교가 낡은 가죽 부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가죽에 기름칠을 계속해주고, 유연해질 수 있도록 만져주어야겠지요. 그건 곧 신학적인 사유와 세상과의 대화를 넓혀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자기 자신의 내부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따라서 자기를 개혁해 나가야하겠지요.

이길용

2006.09.29 23:44:30

재임용 거부당한 강남대 교수는 기독교학과가 아니라(강남대는 기독교학과는 없고, 신학과와 종교철학과가 있습니다) 교양과정부 [기독교와 현대사회] 강의 전담교수였던 이찬수 박사입니다.

EBS에서 방영한 특집프로그램 촬영시.. 사찰 대웅전에 들려 불상 앞에 예를 표했다는 이유로 해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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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9.29 23:49:39

아,기독교학과가 아니라 신학과군요.
그걸 그렇고,
이사 준비는 잘 하고 계시오?
이번에는 편안한 이웃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를 해야겠소이다....

이길용

2006.09.30 00:14:13

종합대학 내에 기독교학과라고 있는 것은.. 이화여대, 숭실대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이사는 추석 지낸 그 다음주 토요일에 합니다. 이삿짐 센터와도 계약 끝냈고.. 이제 돈쓰고 힘쓸 일만 남았네요~

뭐 어디든 못 견디겠습니까? 그래서 때론 지옥이 천국행의 첫 관문인 것 같습니다 ^^;;

[레벨:4]New York

2006.09.30 05:54:08

지금 이 시기에 목사님이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우선 목사님이 드신 강남대학교 신학교의 예를 받아 “신학적인 사유와 세상과의 대화를 넓혀가”보도록 하겠습니다.

90년대에 “역사의 끝”을 써서 스타 사회학자가 된 프란시스 후꾸야마라는 학자의 근래의 책에서 그는 이 새로 도래한 글로벌 무한 경쟁체제에서는 신축성(flexible) 있는, 유연한 조직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정치조직은 “필요”에 의해서 행정이나 경영에서 비효율적입니다. 학교라는 조직은 그 행정이나 경영이 그야말로 원시적으로 비효율적입니다. 거기서 신축성을 찾기를 기대하기는 조직적으로 힘듭니다. 지금 일부 대학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운동도 부분적으로 전개된다는 소문도 들립니다. 어쨌든 그렇다치고 교회는 어떨까요? 지금 교회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유대교의 입장에 서있습니다.

이는 지금 아주 훌륭한 목사님을 두고 부흥이 일어나는 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공한 교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에서 제시되는 근본적인 문제를 벗어나기가 더 힘들 수 밖에 없기때문입니다: 아무리 그 헌 생베 조각을, 현 교회 상태를 한탄하고 문제를 제시한다 하더라고 그 헌 생베조각이 그 교회의 현실이요, 주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에는 헌 포도주를 넣어야만이 “성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세상과의 대화를 넓혀” 봅시다. 90년대에 지금은 “The Innovator’s Dilemma”라는 책의 형식으로 나온, “When New Technologies Cause Great Firms to Fail”라는 부제라는 나온 그 paper를 발표해서 거의 최고 스타 비즈니스 학자가 된 Clayton Christensen 현 하바드대 교수가 있습니다(한글 번역본을 그 교수님의 사무실에서 보았으니 한국에 번역되어 나왔을 것입니다). 이는 경제학 책도 아니고 현실적인 답을 내야하는 비즈니스 책입니다. 그 책의 이론에 바탕을 둔 콘설팅회사도 만들어졌습니다. “인텔사”의 최고 경영자가 “무섭다(scary)”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성공한 회사가 잘 나가기 때문에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이유”때문입니다.

잘 나가는 회사가 왜 잘 나겠습니까? 그 회사의 Best Customer들의 수요와 필요를 Best Serve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공하고 있는 교회가 왜 잘 나겠습니까?’ 그 교회의 Best 신자들의 수요와 필요를 Best Serve하기 때문에 잘 나갑니다. 그런데 인터넷 같은 Disruptive한(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Technology가 도래하는 과정을 보면 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를 들어 신세계내지는 이마트와 이베이(옥션닷컴)를 비교해봅시다. 인터넷의 초창기에는 기존 리텔일러들의 고객들은 인터넷으로 상품을 구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고객 중심”의 성공한 리테일러(retailor)가 예산과 인력을 책정하여 도래하고 진실로 중요하고 획기적인 기술을 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는 그 회사의 고객이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는 “그 당시”에는 작고 민첩하고 기업정신이 있는(entrepreneurial) 회사에게 도래하는 산업성장의 다음의 큰 기회를 넘어줍니다. 즉, “고객중심”의 기존 회사의 고객이 인터넷으로 상품을 구입의 필요가 생겼을 때에는 이미 기존의 큰 회사는 그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경쟁력이 없습니다. 최근의 가장 좋은 예는 “서치”의 기능을 간과해서 야후와 마이크로소프트는 아주 조그만했던 구글에게 그 기회를 넘겨주었습니다. 현 구글은 큰 자동차회사들의 시장가격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야후나 마이크로소프트도 불과 얼마전(?)에는 아주 작은 회사였는 데 성공했기에 “실패”를 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섰다는 것입니다. 이는 경영학 측면에서 보면은 지나친 고객 중심으로 인해 새로운 시장과 고객을 창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교회는 방만하게 꾸려가도 “지나치게” 고객중심, 성도들 중심으로 하면 잘 꾸려나갈 수 있습니다. 전 대우 창업자이신 김우중씨가 잘 나갈 때에는 방만하게 경영해도 설마 대우 같은 회사가 망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안 있어 “방만하게 경영한 회사”들은 날라갔습니다. 대우도 날라갔습니다. 한 때 한국 젊은이들의 신화 같은 영웅이었던 김우중회장은 도피생활 하면서도 자신도 남들이 하는 것처럼, 그 때 그 상황에서는 다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다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들 헌 생베 조각을 기우고 낡은 가죽 부대에 헌 포도주를 붇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시 살아있는 새 포도주입니다. 그래서 항시 “disruptive”합니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에서는 생존전략은 하나뿐이라고 예전에 내놓았습니다, “Only the paranoid survive.” 즉, 파라노이드 될 정도로 위기의식을 가진 자나 회사들만이 신경제에서 살아남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경제에서는 가면 갈수록 기존의 질서를 깰만큼의 변화의 속도가 증가하기때문입니다. 열린 회사가 아니면 도대체 살아남을수 없습니다. 교회는 어떠합니까? 기존의 질서를 항시 깨시고 임재하시는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는 어떠해야 합니까? 물질중심주의에서, 무한 경쟁시대에서 가족을 당장 꾸려갈 물질을 가져올 자신의 회사가 도퇴되거나 자신이 그 회사에서 도퇴될 수 있다고 위기의식을 불어넣으면 경제활동에 필요한 위기의식으로 무장할 수 있습니다(실상 지금은 그 깊이에 있어서 그 이상입니다). 과연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 밖에서 그 항시 새로운 포도주를 담을 가죽 부대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레벨:4]New York

2006.09.30 05:59:04

목사님,

“지금” 이 시기에 목사님이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의 말씀을 “여기에” 적는 것은 때가 됐음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은 것뿐만이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저는 지금 새포도주를 담을 새 가죽 부대를 찾고 있고 찾아야하고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그 가죽부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메일에서 드렸던 얘기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했듯이 “지금까지는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였으나, 다시는 내가 비유로 말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 줄 때가 올 것이다(요한복음 16:25).” 그 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을 밝히기위해 A부터 Z까지 그 증거들을 준비했습니다: 사회 자연과학, 예술, 비즈니스, 글, 말씀, 부모가 된다는 것, 우리가 일을 한다는 것등에서 “아버지”가 실제로 구체적으로 명확히 “무엇”을 뜻하는 가를 글로, 말씀으로 나타내었습니다. 통으로 새 포도주입니다. 여태까지 인간문명사를 ‘한 과거(one past)”로 돌릴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새 포도주입니다.

우선 category에서도 그렇습니다. 근대 현 대학의 Departmental Structure는 Positivism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물론 지금 leading 학자들은 “convergence”의 시대라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대학은 각 학과로 나누어져 있고 학계지도 마찬가지이고 아직 “Convergence”의 놀이터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버지”를 명확히 나타내는 그 paper를 쓸 때에는 막연히 학계지에 발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분야를 거의 총 망라해 근본적으로 그 증거를 제시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이를 받아들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이 포도주를 담을 학계지는 없습니다. 지금의 학계지는 “전문성”에 그 초점을 두기에 그렇습니다. 전문성을 뛰어 넘을 놀이터는, 새 가죽부대는 학계에는 없습니다. 지난 수년간에 수학의 큰 두 문제를 푼 두 학자도 각기 혼자 오랜 세월을 다락방에서 그 문제들을 풀었다는 것은 재미를 넘어서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새 포도주를 담아낼 새 가죽부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의 교회”를 통해 발표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러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우리 주의 이름으로 해나감을 확실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않게 하려는 유혹은 지독하게 셉니다. 저의 교회라함은 제가 지금 미국에서 다니는 교회와 그 커뮤니티, 그리고 저는 이재철 목사님의 100주년 교회의 말씀을 인터넷을 통해 듣고 있고, 신학적이고 성서 연구등 성경 공부를 통해 지금 다비아에서 매일 “기름치고” 있습니다. 즉, 저의 교회는 미국의 교회와 100주년 기념 교회 그리고 다비아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건물을 지칭하지 않음이 이 시대에는 확실히 나타나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 한국에서는 목사님과 이재철 목사님과 함께 이 새포도주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를, 어떻게 발표하는 가부터 시작해서 같이 하자는 말입니다. 참고로 저는 그 새 포도주를 영어로 썼습니다. 아마 영어를 상당히 잘 하는 사람 하나가 필요할 것입니다(혹 지금 주위에 있다거나 찾으시면 영어로 저에게 이메일 왕래를 하면 제가 그 잘함을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는 정말 다릅니다). 예전에 뉴욕타임즈의 유명한 편집인이 유럽과 통계를 비교해가며 미국만이 유일하게 아직 기독교적 믿음이 중심으로 남아있는 “산업화된” 국가라고 할 때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 예외임을 지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미국과 한국에서 시작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 이재철 목사님에게 이해를 구한다는 것이 특히 처음에는 지금 현실에서 힘들수도 있지만 바로 그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목사님도 이재철 목사님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소통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을 명확히 말씀하셨는데 이제 무엇을 주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여기 다비아 가족들도 도우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다비아 자체가 진실로 하나님 중심의 교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지난 정보혁명인 인쇄를 통해 우리는 인쇄된 성경을 널리 가질 수 있었기에 중세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이 지난 세월에 이미 가능해졌습니다. 지금 그보다 더 엄청난 정보혁명 속에서는 또한 차원이 다른 일들이 다 가능합니다.

이제 가능합니다. 정말로 절대절명의 위기의식과 책임감 그리고 엄청난 기쁨으로 할 일입니다. 즉 방만하게 남의 교회라는 다른 목사라는 의식을 극복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서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재철 목사님은 그 분으로 성공하셨기에 지금 정목사님이 다비아를 통해 하시는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정목사님도 그러합니다. 서로가 열음으로써 우리는 헌 가죽부대가 새 가죽으로 나는 것을 애초에 항시 확실시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헌 가죽부대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성공적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헌가죽부대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 끼니를 먹지 않고서, 금식하고 얼마나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위기의식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저도 저 자신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 엄청난 시대에 누군가에는 떨어질 그 발견이 왜 저한테 떨어졌는가를. 그 중의 한 큰 축의 이유가 제가 한국인이기에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한국인은 구구한 역사를 통해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철저히 위기의식으로 무장된 민족입니다. 아마 이는 다 한국인이 사는 한국에서는 비교되어 느끼기는 힘들겠지만 그 위기의식 때문에 그나마 우리 한국인은 항시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시는 헌 가죽부대를 터뜨리시는 예수님의 복음을 기독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힘들 정도로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는 여태까지 한국인으로 살아야 했기에 힘들고 힘들었던 그 서러움이 투자가 되어 엄청난 기회를 맞고 있다고 증거를 보고 있는 저는 감히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그래도 밖에 나가서 한국인을 보면 별 거 아닌 것 같습니까? 좋은 최고 학교의 학생의 예를 들지요. 한국의 서울대생이라 합시다. 서울대에 있으면 다 서울대생이어서 그들은 그리 특별함을 모릅니다. 엘리트들의 무장된 열등의식을 겪어 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어쨌든 한국에 있으면 다 한국 서울대생인데 그 특별함을 느낄 수가 없지요.

목사님,
행동하시기 전에 저를 더 느낄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목사님의 글을 읽고 목사님과 글로 나누면서 가진 자신감은 목사님은 이미 느낄 수 있는 목사님의 "내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얘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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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9.30 23:54:16

뉴욕 님,
조금 당황스럽군요.
조금 천천히 진도를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는 아직 궁극적인 것을 느낄 수 있는 내공이 없는 사람입니다.
흘낏 뒷그림자만 본 것 같은 느낌이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현실적으로 영어 선생을 중간에 두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건은 안 됩니다.
뉴욕 님의 글에서 공통점이 많다는 걸 느끼지만
모든 게 그런 건 아니군요.
성서를 보는 관점 같은 것 말입니다.
나는 기독교 2천년의 신학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뉴욕 님은 그걸 초월하시는 것 같네요.
선악과 문제 같은 데서 그런 걸 느꼈습니다.
나는 '역사'를,
그림자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붙들고 있습니다.
뉴욕 님은 역사보다는 그 초월을 붙들고 계시군요.
어쨌든지 조금 천천히 가는 게 좋겠습니다.
좋은 추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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