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241) 요 11:10 실족

조회 수 1003 추천 수 0 2020.01.24 20:32:23

예수 어록(241)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실족은 발을 잘못 딛는다는 뜻이다. 실족은 실족으로 끝나지 않고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등산 중에 실족하여 중상을 입거나 심지어는 추락사하는 일도 있다. 젊었을 때는 실족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늙으면 쉽게 실족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시 하겠다. 별로 실감하지 못하다간 최근에는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더 실감하게 되었다. 집안에서 문이나 벽에 살짝 부딪혀도 몸이 크게 충격을 받는다. 발을 조금 잘못 디뎌서 중심을 잠시 잃는 경우도 생긴다. 시골로 들어와서 2층 생활을 6년 반 넘게 했다. 언젠가는 한 번쯤 계단에서 낙상할 각오를 했다. 다행스럽게 낙상 없이 이제 1층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늙으면서 겪게 되는 몸의 불균형은 피할 길이 없다. 이럴 때는 가능한 한 천천히 움직이는 게 최선이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실족하지 않으려면 삶을 천천히 살아가는 게 최선이 아니겠는가.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은 평생 초고속이다. 그래서 실족도 많다. 젊을 때도 삶 자체는 속도를 늦추는 게 좋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이게 잘 안 된다.

빛이 안에 없는사람이 있다. 빛이 없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삶의 본질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현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또는 어둠에서 사는 거와 같다. 다른 하나는 삶의 방향이 없는 것이다. 각자 삶의 방향이 있다고 생각하긴 한다. 돈을 많이 벌어서 신바람 나게 사는 것이다. 이걸 궁극적인 삶의 방향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닐는지.

위에서 설명한 빛이 없다는 말의 두 가지 의미는, 설교조로 말하면, 생명 충만감이 없는 삶을 가리킨다. 혹은 거짓 생명 충만감에 속는다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생명 충만감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걸 실제로 어느 정도로 경험하는지는 자신의 영적인 수준에서 주어질 것이다. 포도주나 차의 맛을 느끼는 수준도 천차만별이라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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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2020.01.24 21:13:21

목사님, 1층으로 내려 오신 거 잘하셨어요.

그래도 계단 벽에는 안전대를 설치해 두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통한 생명 충만감을 저는 어느 수준에서 느끼고 있을까.. 긍금해집니다.

아마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바랄 궁극적 목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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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20.01.25 18:24:27

예, 아무도 생명 충만감을 완성했다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요.

우리 기독교인은 푯대를 향해서, 

가능한대로 허공에 삿대질 하는 일 없이,

보이면 보이는대로, 안보이면 안보이는대로,

가다가 힘들면 좀 쉬기도 하면서,

앞으로, 그리고 또 앞으로 나아가는 게 최선이겠지요.

이런 훈련이 어느 정도 된 사람은

그분이 옆에서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느낄 겁니다.

즐거운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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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37) 요 10:38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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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37)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예수는 대담한 발언을 계속한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예수 당신을 믿지 못하더라도 예수에게 나타나는 일은 믿으라고 말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전적으로 의존해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예수의 행위에 나타나는 모든 일은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를 이룬다는 증거다. 그 일은 창조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다. 즉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예수...

예수 어록(236) 요 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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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36) 요 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 예수는 일관되게 자기의 행위, 즉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근거로 해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예수의 행위는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병든 사람과 장애인을 고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다. 그 사실은 유대인들도 다 안다. 그 사실만으로는 예수를 비난할 수 없었기에 신성모독을 끄집어낸 것이다. 그들은 원래 삐딱한 사람들...

예수 어록(235) 요 10:36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 2020-01-16
  • 조회 수 1008

예수 어록(235) 요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앞에서도 말했듯이 예수는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말하거나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런 표현도 듣기에 따라서 신성모독으로 비치겠지만 예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 두 표현 모두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한다는 의미이다. 예수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유대인들의 ...

예수 어록(234) 요 10:35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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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34) 요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 예수는 “당신은 자칭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라는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35절에서 부연하여 설명한다. 그 설명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이 실제로 신이 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성에 가까이 간다는 뜻이다. 이게 이상한 주장이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신다.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

예수 어록(233) 요 10:34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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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33) 요 10:34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유대인들도 예수의 행위가 선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예수의 행위가 아니라 ‘신성모독’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33절은 유대인들의 비난을 이렇게 전한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다.” 예수는 자칭 하나님이라고 발언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세상에 실제 인간으로 나타날 수 없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 말이 이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 신적인 능력인 구원을 보이는 존재는 메시야, 또는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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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32) 요 10:32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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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32) 요 10:32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예수의 발언은 거기 모였던 이들을 발칵 뒤집었다. 그럴만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지극히 존엄한 존재로 여기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대놓고 부르지도 않았다. 야훼(여호와)라거나 엘로힘(하나님), 또는 아도나이(주)나 엘 샤다이(만군의 주)도 하나님을 직접 호명하는 게 아니다. 거룩하신 분, 세상을 창조하신 분,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표현만이 가능하다. 예수...

예수 어록(231)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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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31)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드디어 가장 위험한 발언이 나왔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게 예수의 실제 발언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요한복음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는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예수가 실제 이런 자구로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발언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한 생각은 했을 것이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영혼 전체로 느끼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

예수 어록(230) 요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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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30) 요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며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예수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만물보다 큰 아버지이다. 만물보다 큰 존재는 만물에 제한받지 않고 만물을 초월한다. 예수는 바로 그 하나님이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는 아버지라고 보았다. 이런 사실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눈에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는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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