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2일 사탄아!(3)

조회 수 2004 추천 수 10 2008.05.21 22:02:35
2008년 5월22일 사탄아!(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대립할 때를 우리가 분간하기 어렵다고 어제의 묵상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며, 사람의 일은 그런 걸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시각을 보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이 아직 기독교의 신앙으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인류 구원의 길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밖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확연하지 않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군요.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경험을 뛰어넘는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오성(悟性)을 근본적으로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으며, 어떻게 진행할는지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가 이 세상의 합리적인 인식의 차원에서 도망가는 것뿐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가지론을 주창하기도 할 겁니다. 그런 주장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세상을 무시하거나 상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세상의 새로운 깊이를 말하는 겁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심층에 생명의 현실이 은폐의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이런 생명의 은폐된 깊이를 놓칠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분간해낼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사탄의 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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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2008.05.22 10:40:47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을 뜻과 섭리를 통해 움직이신다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셔서 우리의 간구를 통해 바꿀 수 없다는(결국 침묵하신다는) 것,
그 사이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잠잠히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일가요?
본문과는 크게 상관 없지만 최근의 생각과 오버랩되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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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5.22 23:39:02

성서에는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신다는 이야기가
흔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분명하게 나옵니다.
모세의 간청으로 광야의 히브리 민족을 쓸어버리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마음이 달라지셨어요.
아브라함은 소돔 멸망을 앞에 두고 천사들과 거래를 합니다.
의인 50명에서 10명으로 내려오지요.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행위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도 때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사실 사이을
실증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각각은 다 옳지만, 함께 엮어 놓으면 부조리할 수 있도 있거든요.
여기서 어떤 길을 찾아야하는데요.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과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잠히 있어야 하는지, 나름으로 행동해야 하는지는
별 개의 문제랍니다.
그리고 차원에 따라서 다른 답이 주어지는 거지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능력은 전혀 없어요.
그러나 우리 앞에 벌어지는 악과는 과감하게 투쟁해야겠지요.
나면서 시각장애인 앞에서
예수님은 조상의 죄도 아니고 이 사람의 죄도 아니라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그를 고쳤답니다.

기독교의 사유와 행동은 기계적으로 결정된 게 아니에요.
상황에 따라서 투쟁해야 하기도 하고,
또는 잠잠해야 하기도 해야지요.
그걸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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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2008.05.23 02:42:56

성서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이야기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사건들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인지
아니면 성서기자의 신앙고백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셨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대하여 마음을 바꾸시는 것
그것 까지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안에 포함되는 것이 아닐른지요.
이런면에서 마르바 던이 지적한 것 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이 바뀌시는 건
아니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 좋은 길을 하나님께서 아실 테니까요.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기독교의 사유와 행동은 기계적으로 결정된 게 아니라는 점에 물론 동의합니다.
본 훼퍼처럼 명백한 악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라도 행동에 나서야겠지요.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일하심을 느낄 때 잠잠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디까지 초월적으로 또 인격적으로 생각해야할지
그 하나님께 내가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할른지, 내가 가져야 할 영성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나를 왜 이땅에 보내셨고, 내게 무엇을 원하시고 계신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여러 생각들이 많이 들곤 합니다.

[레벨:2]나이스윤

2008.05.23 13:13:22

자유의꿈님처럼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부족하나마 저역시 오래도록 하고 있답니다.
다비아에서 도움이 되고 있고 계속 도움되어지길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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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5.23 23:05:52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라....
아마 죽을 때까지 완전한 정리는 안 되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지성적 노력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온전하게 파악하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실존철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피투적 존재'이고,
성서적 표현으로는 피조물이며 질그릇이기에
그것 너머를 확연하게 인식하기는 불가능하답니다.
다만 주어진 것만큼, 계시된 것만큼만이라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더 근본적으로는 궁극적 현실인 그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적 노력으로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 신비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C.S. 루이스도 지금 우리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우리의 얼굴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입니다.
Till we have a face!
기다림과 참여의 영성을 향해서,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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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3일 ‘어록’6-2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1992년의 일로 기억됩니다만,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아주 씁쓸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일명 다미선교회 사건입니다. ‘다미’는 ‘다가올 미래’의 이니셜입니다. 그 낱말 자체는 기독교의 본질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미선교회의 종말론 이해가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미숙할 뿐만 아니라 대중성에 편승...

6월22일 ‘어록’6-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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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2일 ‘어록’6-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이틀 전의 묵상에서 저는 위의 본문을 잠시 언급했습니다. 제자들이 살아있을 때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바로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걸까요? 일단 바로 앞 절과 연결해서 본다면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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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1일 ‘어록’5-9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예수의 재림이 곧 세계 완성이라는 어제의 묵상을 조금 더 보충해서 설명해야겠습니다. 여기서 일단 키워드는 ‘세계완성’입니다. 도대체 세계가 완성된다니, 그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 세상을 완성된 것으로, 또는 완전한 것으로, 아니면 대단히 뛰어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세상을 잘 이용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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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0일 ‘어록’5-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온다.”는 것은 물론 재림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재림신앙을 근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재림이 이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막 9:1) 재림이 지연되면서 초기 기독교 내부에서 어떤 혼란이 일어나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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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9일 ‘어록’5-7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선 고대인들이 왜 천사를 생각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기독교 화가들의 그림에도 천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라파엘의 천사 상이 저에게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한 손을 턱을 괴고 하늘을 쳐다보는 천사의 그림이 저의 집에 있는데, 그걸 볼 때마다 라파엘에게는 하늘에 대해 관심이 참으로 많았...

6월18일 ‘어록’5-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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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8일 ‘어록’5-6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인자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마지막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의 언급으로 접고,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라는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영광과 거룩한 천사는 사실 심판과 연관되는 용어라는 점에서 심판 개념의 보충 설명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아버지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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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7일 ‘어록’5-5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또는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하지만 그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추상적으로만 접근한다는 데에 있겠지요. 구원도 결국 죽어서 천당 가는 정도로만 받...

6월16일 ‘어록’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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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6일 ‘어록’5-4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한국교회에는 심판자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마치 염라대왕쯤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태만한 자들을 유황불이 뜨겁게 타고 있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처럼 겁을 주기도 합니다. 성서에는 그런 그림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종교적 메타포이지 실체를 말...

6월15일 ‘어록’5-3 [6]

  • 200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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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5일 ‘어록’5-3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오늘 묵상의 말머리로 삼아야겠습니다. “심판당한 분을 심판자로 믿으니 말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이 저의 독창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어디서 읽은 게 무의식적으로 기억이 난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심판 ...

6월14일 ‘어록’5-2

  • 2008-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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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4일 ‘어록’5-2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위의 어록에 나오는 단어인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은 우리말로는 특별한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구약성서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묵시문학적 전승과 연관된 것인데, 이 세상(에온)의 마지막에 올 심판자를 가리킵니다. 인자가 단지 심판자라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떤 특별한 권능을 소유한 분이...

6월13일 ‘어록’5-1

  • 200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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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3일 ‘어록’5-1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위의 말씀을 앞에 둔 저는 지금 현기증이 날 것 같습니다. 저 말씀이 말하려는 세계를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설명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신앙을 바르게 드러내지 못하면 결국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6월12일 ‘어록’4

  • 200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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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2일 ‘어록’4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막 8:37) 그렇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당연히 죽기 싫어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삭막하더라도 살아남는 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은 우리가 도구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

6월11일 ‘어록’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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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1일 ‘어록’3(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목사들은 우선 자기 구원에 천착해야 한다는 어제 묵상의 마지막 구절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목사들은 이미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경험했으며, 이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사명감은 사실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 하는 사람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인데, 그런 생각은 큰 오해입니다. 이 세상에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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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0일 ‘어록’3(4)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온 천하와 자기 목숨의 대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목회자와 관계된 한 가지 사실만 짚을까 합니다. 오늘 교회 지도자로 자처하는 우리 목사들은 목회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이런 사명감을 강조하고, 목회 현장에 나오면 이런 요구가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목사들의 목회적 열정에 대해서...

6월9일 ‘어록’3(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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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9일 ‘어록’3(3)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앞의 두 묵상에서 저는 온 천하와 목숨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했습니다. 목숨은 온 천하와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에 따르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우리 삶의 능력으로 확보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온 천하를 얻는 방식의 삶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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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8일 ‘어록’3(2)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기독교 신앙은 온 천하에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어제의 묵상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묵상은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언어의 세계에 몰두하듯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 몰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온 천하를 얻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

6월7일 ‘어록’3(1) [3]

  • 2008-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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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7일 ‘어록’3(1)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위의 어록에는 ‘온 천하’와 ‘목숨’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대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지만 밖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겁니다. 세상의 생각은 온 천하를 얻는 것이 바로 목숨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온 천하를 무조건 나쁜 뜻으로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모든 성실한 노력도 모두 온 천하에 속합니다. 예컨대 슈바이처나 데레사 같은 이들의 삶도 역시 온 천하입...

6월6일 ‘어록’2(5) [1]

  • 2008-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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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6일 ‘어록’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주님은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어제의 묵상에서 짚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부활이 왜 생명을 잃음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인지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70,80년이고, 유별나게 길어야 90년입니다. 기...

6월5일 ‘어록’2(4)

  • 200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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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5일 ‘어록’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자칫 기독교 신앙에서 금욕과 자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기 기독교는 이런 금욕적인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청교도, 각성신앙, 부흥운동도 크게 보면 이런 흐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삶을 가능한대로 부정하고 거룩한 삶에 매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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