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8일 깃들 곳

조회 수 1799 추천 수 34 2007.03.08 08:12:36
2007년 3월8일 깃들 곳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 4:32)

신약학자들의 일부 견해에 따르면 오늘 본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비록 작은 공동체로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들었으며, 또한 모여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기독교는 지금 큰 나무와 같습니다. 유럽의 기독교가 아무리 쇄락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종교이며, 남북 아메리카도 개신교와 가톨릭이 중심 종교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상황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큰 나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미 큰 나무로 자랐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주춤했지만, 그리고 개별 교회의 편차가 심하긴 하지면 전체적으로 8백만 명 정도가 개신교 교인들이고 5백만 명 정도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라는 건 기독교의 힘이 한국사회 안에서 막강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기독교라는 나무에 새들이 깃들어 쉴 수 있게 하는 것이겠지요. 나무를 더 크게 만들기 위한 작업보다는 나무의 그늘을 만드는 일이 더 시급하고도 본질적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우선 영성의 심화가 중요합니다. 신학적인 깊이와 생명 운동의 실천이 어우러지는 영성이 심화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와서 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신자들이 거룩성을 경험할 수 있는 예전과 교회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에 근거해서 소수자들에게 조금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접근해야겠지요. 소수자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시혜가 아니라 기독교 영성의 존재론적 근거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이 쉴 수 있는 영적인 그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레벨:23]브니엘남

2007.03.08 11:00:17

목사님 이 부분의 말씀은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어떻습니까?
나물이 커서 큰 나무가 됨: 비정상적인 성장, 기능 상실(창 1:12);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비정상적인 성장과 기능 상실, 이는 작금의 교회에도 해당됩니다. 이는 딤후 2장 20절의 큰 집과도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새들: 악한 자(막 4:4)
그러므로 나무도 비정상적이고 새들도 악한 자들을 의미함으로 사람이 쉴 수 있는 영적인 그늘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지 않을까요.

[레벨:8]김인범

2007.03.08 17:13:49

그렇게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틴에는 이렇게 새들이 깃들일 만한 큰 겨자나무는 없답니다.
겨자나무는 사람들의 키만하거나 조금 큰 관목이랍니다.
그래서 이걸 비정상적 성장이라고 보는 거지요.
말세가 되면 교회의 비정상적 성장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은 브니엘 남 님이 말씀하신대로
아니,주님의 같은 비유에서도 새는 악한 것을 지칭했으니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 전에 웨스트민스트에 있었던 캠벌몰간과
미국 필라델피아 제십장로교회 담임 목사였던
이름이...아마 위런 위어스비 로 기억하는데 이런 분들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으로도 오늘의 현실에서는 오히려 이런 해석이 더 와 닿는군요.

[레벨:8]김인범

2007.03.08 17:23:49

말 나온 김에 이런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의 성장은 분명 절대적으로 옳고 필요한데
그것이 개 교회의 성장개념으로만 이해되어서
교회성장학이 개교회의 전략으로만 이해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인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과론적인 면에서도 개교회의 지나친 비대함이
신앙적으로 유익한 것이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한번씩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개교회의 사이즈가 커져서 얻는 신앙인들의 유익이 뭔가를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도요.
물론 어느 정도의 사이즈가 정상인가는 답하기 쉽지 않겠지만
오늘날처럼 이렇게 무조건 큰것이 잘하는 것이란 생각은
너무나 비성경적인 것 같습니다.

[레벨:23]브니엘남

2007.03.08 21:56:55

그래서 제가 사랑채에 소국과민이란 그글을 올렸습니다.

[레벨:28]첫날처럼

2007.03.09 01:25:55

앞의 구절 연장선상에서 봐야하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인데, 그 것이 어떻게 부정적인 결말로 끝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새가 악한 자를 상징한다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게, 비유의 상황 속에 나타난 새의 역할에서 어떤 의미가 나오는 것이지, 그냥 단순히 앞의 비유에서 새가 "악한 자"를 상징했기 때문에 뒤에서도 당연히 악한 자를 상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가 아닐까요?

[레벨:0]riveroad

2007.03.09 01:28:31

마침 미국교회에서 마가복음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 겨자나무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길,
중동지역의 겨자나무는 그리 튼튼한 나무가 아니라서
새가 나무 안*에 깃들기보다는 나무 아*래에서 쉴 정도로
약한 나무라는 해석도 있다고 하더군요.
(중동지역이 겨자나무에 대한 이해가 도움이 될 텐데..)

튼튼하고 울창한 나무가 아니라,
겨자나무와 같이 약한 나무가
새와 같은 작은 자들의 쉼터가 된다는 점에서
십자가 신앙과 연결이 된다는 설명을 함께 해 주더라구요.

겨자나무의 수수께끼를 풀어야겠네요^^;;
좋은날 되이소~

[레벨:23]브니엘남

2007.03.09 08:38:32

첫날처럼님, 제가 마 13장의 해석을 안하려고 했는데 조금은 해석을 해 보도록 해 보겠습니다. 온전한 지는 모르겠지만.

마 13장에서 처음 비유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 말씀을 씨로 뿌렸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 같으니"란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비유에서 부터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 같으니"란 말씀이 나옵니다. 즉 그 때는 이미 초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형성되었지요.

그러나 조금 있다가 초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형성된 그 곳에 원수 사탄이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가라지 뿐만 아니라 공중의 새들, 즉 악한 자들 까지도 교회 안에 깃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고요. 그 다음에 교회는 부풀려 져서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부패한-누룩과도 같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를 더 부수적으로 말씀드리면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한 장 안에서 같은 것이 하나는 긍정적으로 하나는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 13장의 비유는 계시록에서의 7교회의 변천사와 너무나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경 해석의 방법도 있구나 참고 하세요.

믿음 안에서의 형제된 사람이......

[레벨:28]첫날처럼

2007.03.09 17:00:44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가 그런 식으로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건 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그런 식의 비극적 결말... 교회사가 결국 그렇게 흘러갔고 또한 그걸 증명한다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본질적 해석이라기 보다는 사후예언적(事後預言的) 해석이랄까... 그런 느낌이 드네요... 단순한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느껴지기도 하구요...

저는 시적으로, 종말론적인 완성으로 이해하고 싶군요...

그리고 각 장(chapter)과 절(verse)의 구별이 성서에 원래부터 존재한 건 아니고 사용상의 편의를 위해서 붙인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몇 가지 주제의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같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두 비유는 서로 독립적인 가치를 가지는 개별 비유로 보이거든요...

[레벨:28]첫날처럼

2007.03.09 12:41:34

그리고 누룩 이야기도 하셨는데, 어떻게 "누룩" 이라는 것이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바리새인의 누룩이냐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냐에 따라서 누룩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져버리는데요...

[레벨:23]브니엘남

2007.03.09 12:46:07

성경에서 누룩은 한 번도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 어디에 나옵니까?
마 13장은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레벨:28]첫날처럼

2007.03.09 13:17:33

제가 잘못 표현했군요... 누가복음 13: 20절부터 하나님 나라를 비유할 때 빵을 부풀게 하는 누룩으로 설명하신 본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이런 누룩과 같다고 적혀있습니다... 님은 이 본문도 부정적으로 해석하시겠군요...

성서에 누룩을 실체로서 표현한 적은 없습니다...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누룩의 성격을 빌려온 것이지, 그 속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의미를 미리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질을 흐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제넘게 말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

[레벨:23]브니엘남

2007.03.09 21:40:12

성경에서 누룩은 악한 것들(고전 5:6, 8)과 악한 교리들(마 16:6,11,12)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의 교훈은 외식하는 것이고(마 23;13), 사두개인의 교훈은 부활과 천사들과 영들을 부인하는 것이고(행 23;8), 헤롯의 누룩은 정치상의 부패와 불공정 그리고 어둠입니다.

소제에서 밀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듯이 교회, 즉 우리 안에도 어떤 누룩이 있어서는 안됩니다(레 2:11).

[레벨:0]求道者

2007.03.09 17:04:09

브니엘남님의 자신 있으신 해석(마13장~)을 읽고 보니
님께서는 정말 <성경 해석학>공부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성경관이나 해석의 기초가 다른 환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니 그럴 필요도 없겠지요.

브니엘남님!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님을 탓하자는게 아닙니다.
어느 면에선 존경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님이 어떤 다른 목적을 가지고
들어오신 분이 아닌가 경계도 했었지만,
이 공간에서 티격태격 하다보니 정(?)도 들고
그렇게 유치한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잠시 얘기가 빗나갔네요.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눅13:20~21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신비하고도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을 얘기 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변혁적이고 혁명적인 뭐 그런...
따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첫날>님의 의견에 한 표를 던집니다.

[레벨:8]김인범

2007.03.09 21:45:13

이 하나님 나라 비유가 여럿으로 등장하는 것이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긍정적 모습과 부정적 모습들을 통해
결국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레벨:0]求道者

2007.03.09 22:12:28

김목사님 안녕 하셨어요?
한 동안 발길이 뜸~하시더니 오늘 이렇게
연거푸 뵙게 되어 반갑네요^^*

브니엘남님!
성경에서 누룩은 한 번도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적이 없다고
단언 하시는 바람에 '발끈' 했었지요.
혹 마음 언짢으셨다면 사과 드릴께요*^^*

[레벨:9]지금여기

2007.03.23 16:58:48

작은 겨자씨가 새가 그 그늘에서 깃들일 만큼 자란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때에 우리처럼 땅을 파고 씨앗을 심는 것이 아니고, 살짝 뿌리는 것으로 씨앗을 심는 다면 ,씨앗을 먹이로 삼는 새는 겨자씨에게는 그야말로 원수일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자씨가 자라서 그늘을 드리우고 자기(혹은 동료)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던 새까지 품을 정도로 넒고 넉넉하게 자라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 아닐까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예수님의 교훈을 적용해 본다면,
결국 겨자씨가 자란다는 의미는 크기 보다는 깊이, 넓이의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의 씨앗이 자랄 수록 '다름'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폭이 넓어져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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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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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2일 성서의 관용어에 대해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막 4:30) 마가복음 4장은 비유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농사에 연관된 개념인 씨, 뿌림, 자람, 결실, 추수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개념의 핵심은 변화, 또는 과정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와 같다는 말입니다. 막 4:30-32절에는 “겨자씨의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체 이야기가 세 구절에 불과한데 그 서론이 한 구절을 차지합...

3월1일 추수 [1]

  • 2007-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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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1일 추수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막 4:29) “씨 뿌림”의 비유가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단계는 추수입니다.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이 마지막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그 때를 우리는 종말이라고 부릅니다. 이 종말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을 결정짓는 요소입니다. 그냥 쉽게 생각해봅시다. 이 세상에 종말이 올까요?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온다는 것은 일단 분명해 보입니다. 지구는 앞으로 45억 정도 지탱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됩니다...

2월28일 땅 (5) [1]

  • 200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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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28일 땅 (5)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 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본문 말씀은 설교행위에 관해서도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서는 청중들과의 만남에서 스스로 청중들의 영성을 키워냅니다. 설교자는 단지 씨를 뿌릴 뿐이고 성령이 그들을 변화시킵니다. 청중들의 생명 사건에서 설교자는 무능력합니다. 이런 걸 모르는 설교자는 자신들이 신자들을 변화시킬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일이 모든 ...

2월27일 땅 (4) [7]

  • 2007-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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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27일 땅 (4)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 4:28) 본문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아우토마테’의 번역인 이 ‘스스로’는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정확하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스스로 그의 길을 갑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엄청난 착각에 빠진 겁니다. 이는 마치 호랑이 꼬리가 호랑이를 움직일 수 있다는 착각과 ...

2월26일 땅 (3)

  • 2007-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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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26일 땅 (3)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 4:28)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신을 벗으라.”는 모세의 호렙산 전승에서 알 수 있듯이 성서도 자연에 대한 매우 소중한 영성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에서 이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성서는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생각할 뿐이지 그것 자체를 하나님으로 섬기지는 않습니다. 자연 안에 신성이 깃들어있지만(범재신론) 자연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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