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일 새 포도주 (5)

조회 수 1702 추천 수 16 2006.10.02 23:28:38
2006년 10월2일 새 포도주 (5)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막 2:22)

포도주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국교회의 술 문제를 한번 짚어야겠군요. 정통신앙에 묶인 분들은 일반적으로 술을 그리스도인이 금해야 할 중요한 목록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이런 정통신앙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십니다. 꽉 막히지는 않았지만 온건한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바울처럼 교회의 덕과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서 술을 사양합니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술을 성서와 신학에 근거해서 본격적으로 설명하려면 시간이 제법 많이 필요하니까, 여기서는 그냥 저의 개인적인 생각만 간단하게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술은 커피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단순히 기호식품에 불과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커피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것처럼 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한국교회의 전통이 그걸 금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술로 인해서 벌어지는 개인적인, 가정적인 문제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적으로 판단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신이 술을 싫어하면 커피가 싫어서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처럼 마시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가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런 삶의 기호와 습관을 규정하는 차원으로 끌어내리면 결국 복음이 비추는 은총의 빛은 사라지고 대신 온갖 율법의 가치들만 무성하게 될 것입니다. 놀랍게도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포도주 마시길 즐겨(?) 하셨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마음 놓고 술을 마셔도 좋다는 말이냐고요? 이 질문은 커피를 마음 놓고 마셔도 좋습니까와 다를 게 없습니다.

[레벨:4]New York

2006.10.03 06:19:14

글을 쓰는 것과 읽는 것, Reading and Writing:

말씀이 하나님이다.

우선 결론을 말씀드리면 글을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이 더 힘듭니다. 전 덧 글 중 한 번 잠시 비춘 적이 있는 데 좀 더 자세히 나타내 보겠습니다. 자신이 글을 쓴다고 할 때에 정작 들여다보면 정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글을 읽는 데에 쓰여집니다. 그리고 정작 글은 “지금, 여기서” 찰라에 옵니다. 교통사고가 찰라에 나는 것처럼요; 첫 사랑이 찰라에 와서 박히는 것처럼요. 사고(accident)입니다. 어느 영문작가의 표현처럼 문장은 천장에서 떨어집니다. 곧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래서 자식을 둔 부모가 어떻게하면 우리 아이도 글을 잘 쓰냐고 물으면은 난감합니다: 부모가 질문 자체를 이해 못하기에 그렇지요. 질문을 이해 못하고 묻는 질문이 훨씬 더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답을 이해 못하고 답하는 답, 상황논리가 훨씬 더 비일비재합니다.

글을 읽는 것이 정말 불가능하게 힘들기에 그나마 글을 잘 써 “주어야”하는 것입니다: 글을 읽는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자신의” 글을 읽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글이니 완전히 이해하여하는 데에 그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 쓰는 일조차 할 자세를 유지하기 힘듭니다. 물론 가십이나 글의 가치를 따져 볼 필요도 없는 글은 그냥 쭉 써서 갈길 수는 있겠지요. 그렇다고 아무리 힘들게 쓴 글이라도 아닌 글은 아닙니다.

How you write is what you write. 글을 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 어느 정도의 예술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글 수준에 도달하면, 즉, 글을 통해 절대자내지는 절대적인 것(The Absolute)을 나타낼 수준에는 How you write is what you write: “어떻게” 쓰냐가 “무엇”을 쓰냐입니다(제 영어도 번역하기가 힘든데 더 좋은 번역이 가능하면 덧 글을 달아주세요). 그 무엇을 쓰냐는 하나님이 나타냅니다. 모든 “무엇”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쓰자고 정작 앉아서 쓰는 글은 글이 아닙니다. 글쓰는 자신은 투명한 채로, 글을 나타내는 것이, 오직 하나님 말씀을 나타내는 것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글쓰는 이가 투명한 유리가 될 수도 있고 거울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따 먹어서 투명한 유리가 될 수 없다면 거울은 될 수 있습니다. “거울이 좀 덜 먹고 더 반사하는 것을 잘 할 수만 있었다면”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의 길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증명이라는 쌍스러운 과정을 겪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글을 쓸 줄 아는 자가 어느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한다면, 글을 쓰는 것은 고문입니다. 정치적인 목적이든, 어느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쓰든 그것은 글이 아닙니다. 그 무엇은 하나님이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목적은 하나님뿐입니다. 글 쓰는 자가 나타내면 헛되고 헛된 것에 불과함은 물론 하나님이 정작 나타내고자하는 것 조차 가립니다. 여기에 Gorge Orwell이라는 작가가 모든 책은 실패작이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근원이 있고,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서 Kafka가 자신의 글을 모두 불살라 버리라고 친구인 Max Brod에게 한 말이 그냥 해 본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Kafka는 뛰어나서 그 정도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그의 “질문들”을 대해보면 압니다.

여태까지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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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10.04 08:16:27

뉴욕 님,
재미있군요.

[레벨:4]New York

2006.10.04 10:10:29

왜 "재미있게" 느껴질까요?

[레벨:7]늘오늘

2006.10.04 10:29:00

Stayng transpare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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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6일 고발 [1]

  • 200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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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26일 고발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막 3:2)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은 누굴까요? 이 사건 뒤에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공모했다는 6절 말씀을 참고한다면 이 “사람들”은 바리새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바리새인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은 단지 노골적으로 예수님과 대립했지만, 이들은 위선적으로 대립했다고 말입니다. 어쨌든지 ...

10월25일 손 마른 사람 (3)

  • 200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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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25일 손 마른 사람 (3)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 3:1) 손 마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게 하나도 없으며,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은 제가 이렇게 떠들지 않아도 대개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알고는 있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것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건 정말 장광설에 불과합니다. 제 이야기를 직접 예로 드는 게 좋겠군요. 테니스 동호회에는 여러 실력의 사람...

10월24일 손 마른 사람 (2)

  • 200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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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24일 손 마른 사람 (2)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 3:1) 손 마른 사람을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본문을 이렇게 바꿔서 써볼까요? “한쪽 손 마른 장애인인 내가 회당에 앉아 있는 중에 예수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이 사람은 단순히 대상으로 다루어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는 ...

10월23일 손 마른 사람 (1)

  • 200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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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23일 손 마른 사람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 3:1) 1-6절에 기록되어 있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아직 회당에서 축출당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묘사입니다. 유대교 고위 당국자들과의 충돌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 사건이 일어난 다음부터 노골적으로 예수를 해치울 생각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작당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본다면, 이 사건이 예수님의 운명에 아주 결정적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

10월22일 안식일과 인자 (8)

  • 2006-10-22
  • 조회 수 1557

2006년 10월22일 안식일과 인자 (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8) 앞에서 저는 주일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주일이 사람을 억압하는 종교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만을 위한 종교 행사로 떨어지지도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주일, 사람, 인자 사이에 매우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영적인 균형감각을 유지하지 못하면 이런 요소들이 우리의 신앙을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막 2:28절 큐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주일의 주인은 사람을 ...

10월21일 안식일과 인자 (7)

  • 2006-10-21
  • 조회 수 1386

2006년 10월21일 안식일과 인자 (7)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8) 인간의 감수성이 지배하는 예배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재 하는 예배를 우리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구분은 쉽지 않습니다. 저도 말은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신학적 영성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설명해보아야겠지요. 예전(liturgy)과 교회력의 약화는 오늘의 예배가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가장 결정적인 근거입니다. 예전과 교회력은 그리스도교 신앙...

10월20일 안식일과 인자 (6)

  • 200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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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20일 안식일과 인자 (6)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8) 안식일의 주인이 인자라고 한다면 가능한대로 교회 자체나 사람들의 흥미를 줄이고 주님에게 우리의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자는 우리에게 너무 먼 이야기에 불과하고, 그저 우리끼리 재미있게 지내는 것이 훨씬 흥미롭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열린예배”도 역시 안식일의 주인이 인자라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거역하는 예배 행위가 아닐는지요. 물론...

10월19일 안식일과 인자 (5) [1]

  • 2006-10-19
  • 조회 수 1492

2006년 10월19일 안식일과 인자 (5)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8) 며칠 동안의 큐티를 세밀하게 읽으신 분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27절 말씀과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28절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설명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겁니다. 제가 인자에 관한 말씀인 28절을 설명하면서 사람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했으니까요. 그러나 27절과 28절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27절은 종교적 제도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으며, 28절은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10월18일 안식일과 인자 (4)

  • 2006-10-18
  • 조회 수 1751

2006년 10월18일 안식일과 인자 (4)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8) 이제야 우리는 “안식일과 인자”라는 주제를 실제로 묵상할 수 있는 자리에 섰습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주일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사람끼리 즐겁게 지내는 것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주일의 모습이 아닐까요? 브레넌 매닝의 아래와 같은 진술은 바로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럼에도 나는 ...

10월17일 안식일과 인자 (3)

  • 2006-10-17
  • 조회 수 1764

2006년 10월17일 안식일과 인자 (3)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8) 어제 큐티에서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 언급하는 신약성서도 물론 많이 있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이를 대표합니다. 그 이외의 서신에도 그 당시의 부도덕성을 경고하거나, 또는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를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그런 문제를 죄 숙명주의, 또는 십자가 결정론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즉 십자가 사건의 실체가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밝혀진 건 아닙니다. ...

10월16일 안식일과 인자 (2)

  • 2006-10-16
  • 조회 수 1560

2006년 10월16일 안식일과 인자 (2)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8) 어제의 큐티에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실체가 역사 과정을 통해서 탈(脫)은폐되었으며, 그런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진리(알레테이아)는 그런 성격이 있습니다. 한번 드러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역사와 더불어 그 실체가 계속해서 드러납니다. 그래야만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역시 아직 완전하게 드러난 게 아닙니다. 이런 말이 조금 의아하게 생각되는 분들도 있겠군요. 다시 생각해 봅...

10월15일 안식일과 인자 (1)

  • 2006-10-15
  • 조회 수 1978

2006년 10월15일 안식일과 인자 (1)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8) 23절부터 시작된 안식일에 관한 담론이 이제 28절에서 그리스도론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유대인들의 묵시사상이 가리키는 메시아 상의 하나입니다. 복음서는 그 인자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전제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본문 28절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28절을 직접 말씀했을 개연성은 별로 높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마가복음 기자가 창작했다는 말일까요? 이런 대목에서 우리의 성서읽기가 참...

10월14일 안식일과 사람 (3)

  • 2006-10-14
  • 조회 수 1605

2006년 10월14일 안식일과 사람 (3)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7) 예수님이 본문에서 안식일을 해체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에서 안식일과 사람을 대립적으로 다루지 말아야 하지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그 명제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시금석이라는 사실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행위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 사람을 살리...

10월13일 안식일과 사람 (2)

  • 2006-10-13
  • 조회 수 1635

2006년 10월13일 안식일과 사람 (2)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7) 안식일과 사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무엇이 신앙의 중심축입니까?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당연히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게 바로 성서읽기에서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이며,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유지해야 할 긴장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 말씀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은 ...

10월12일 안식일과 사람 (1)

  • 2006-10-12
  • 조회 수 1953

2006년 10월12일 안식일과 사람 (1)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7) 오늘 본문은 보기에 따라서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니요. 그리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니요. 이 말씀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알고 있는 종교와 인간관계를 완전히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절대규범인 안식일을 상대화하는 이런 진술은 신앙의 본질을 꿰뚫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진리의 성격은...

10월11일 진설병 [8]

  • 2006-10-12
  • 조회 수 1968

2006년 10월11일 진설병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막 2:26)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1-6절의 다윗 이야기를 인용했습니다.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 다윗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서 먹을 걸 요청했습니다. 아히멜렉은 마침 일반적인 빵은 없고 제단에 올린 떡, 즉 진설병만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거라도 달라는 다윗에게 아히멜렉은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던 진설병을 다윗에게 내준 이유는 그 ...

10월10일 읽지 못하였느냐?

  • 2006-10-10
  • 조회 수 2148

2006년 10월10일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막 2:25) 예수님께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읽지 못하였느냐?” 하고 물으신 걸 보면 당신 자신은 글을 읽을 줄 아셨던 것 같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와서 “어떻게 처리할까요?” 하고 물었을 때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계셨다는 요한복음의 진술도 이에 대한 근거 자료가 됩니다. 그러나 소위 ‘예수 세미나’에 속한 사람...

10월9일 안식일 (5)

  • 2006-10-09
  • 조회 수 1703

2006년 10월9일 안식일 (5)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4) 구약성서의 안식일은 안식년과 희년 사상의 단초입니다. 이들 개념은 모두 인간의 해방, 자유, 평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생태적인 평화까지 아우르고 있습니다. 구약성서가 이런 개념을 발전시킨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인간 삶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왜곡된 삶을 하나님이 창조한 원래의 뜻에 따라 새롭게 구성해내자는 게 바로 이런 개념들의 ...

10월8일 안식일 (4) [7]

  • 2006-10-08
  • 조회 수 1816

2006년 10월8일 안식일 (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4) 초기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안식일(토요일)을 지켰습니다. 훗날 태양신을 섬기던 로마 제국의 문화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시나브로 주일(일요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예수님의 부활이 일요일이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로마제국이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켰다는 사실이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어쨌든지 예배모임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 하는 것은 문화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별...

10월7일 안식일 (3) [1]

  • 2006-10-07
  • 조회 수 1814

2006년 10월7일 안식일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4) 안식일의 기본 개념은 악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쉼’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이 쉴 줄을 모른다는 뜻이겠지요. 쉬지 못하는 이유는 실낙원 이후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노동을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기초적인 생존 조건들이 보장되었지만 실낙원에서는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궁극적인 생존의 문제는 인간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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