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8

조회 수 330 추천 수 0 2024.03.27 19:40:57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4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은 마지막 심판을 여기서 다시 언급합니다. 온갖 불한당이라는 불한당은 다 열거되었습니다. 그들은 불 못과 유황 못에 던져집니다.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겁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개인에게도 여기서 열거된 불한당 같은 모습이 없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런 문제에서 떳떳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심한 사람이 있고 덜 심한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는 그런 불한당 같은 모습이 종적도 없이 사라질 때만 우리는 안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할 수 있겠지요.

요한은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짚었습니다. 이미 계 20:14절에도 언급된 표현입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똑같은 내용이 반복된 이유를 정확하게 알 길이 없으나 훗날 어떤 이에 의해서 추가된 내용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중요한 대목이라서 일부러 반복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둘째 사망은 완전한 끝장을 의미합니다. 첫 창조의 세계는 사망과 지옥을 비롯한 각종 불한당이 기승을 부렸으나 이제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이 세상을 혼탁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자기 개인의 욕망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워지듯이 말입니다.

둘째 사망이라는 표현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묵시 사상의 표현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극단적인 상징과 은유와 비유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신 분들은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의 손잡이에 몇 가지 색깔을 맞추는 장치가 달려 있습니다. 무슨 색깔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지금의 현실이 펼쳐지기도 하고 또는 과거가 연출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상력은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오늘의 삶과 시간과 역사의 신비를 직관한다는 점에서는 아주 뛰어난 작품입니다. 요한계시록도 그렇습니다. 종말 이후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나 근본에서는 당시 로마 제국의 박해 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을 말하는 겁니다. 둘째 사망으로 종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레벨:9]소유와존재

2024.03.28 13:55:42

이 글을 읽다보니...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두려울 것도 없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가끔씩 죽을 준비를 해봅니다.

그 때 마다 제일 먼저 버릴 것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도 보입니다.


사라질 것들,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두려움을 넘어

"오늘의 삶과 시간과 역사의 신비를 직관"하면서

종말을 앞당겨서 살아가길 소망해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24.03.28 20:44:22

소유존재 님의 지금 그 생각은 많은 그리스도교 영성가들이 마음에 담았던 것들입니다.

그런 생각이 단순히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실체를 얻는 데로 나아가려면

꾸준한 경건 훈련이 필요할 겁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확보하는 노력입니다.

테니스를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방향은 정확하게 잡을 수 있어도

실제로 테니스장에서 라켓을 들고 오랫동안 땀흘리는 훈련이 없으면

그에게 테니스는 관념에 머물게 되고

실제로 테니스장에서 게임을 하는 순간이 오면 헛손질을 하게 됩니다.

저 스스로 죽는 순간에 헛손질, 헛발질 하지 않도록 

깨어서 분발해야겠습니다.

이곳 영천은 오늘 장마같이 봄비가 내렸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환상적인 날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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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막 1:1), 3월20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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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막 1:1), 3월21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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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막 1:1), 3월21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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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1:1), 3월22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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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1), 3월23일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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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1), 3월23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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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2), 3월24일 [4]

  • 200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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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

복음 (2), 3월24일 [2]

  • 200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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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3) 3월25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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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5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3> 저는 앞서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는 구약의 해석이 신약에서는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이 말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 변명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억압된 삶의 구조가, 그런 것들은 대개 경제와 정치에 연관된 것인데, 해방의 구조로 바꾸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분들이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구조를 바꿔나가는 일은 ...

복음 (3) 3월25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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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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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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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2] [1]

  • 200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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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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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4]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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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3]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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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광야 (1), 3월29일 [1]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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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9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1) 마가가 3절에서 인용한 글은 이사야서 40:3절 말씀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글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라 약간 손질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글을 한 절만 인용했지만 누가복음은 이 뒤로 이어지는 이사야...

광야 (1), 3월29일 [1]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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