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2)

조회 수 1432 추천 수 0 2019.09.04 21:39:42

벧전 1:1절에 열거된 지명은 주로 지금의 터키 지역에 속한다. 그곳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다. 흩어진 이들은 디아스포라다. 베드로전서 기자는 기독교인의 삶을 기본적으로 나그네라고 규정한다. 흔한 표현이기는 하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라는 대중가요의 노랫말도 있다. 나그네 개념을 전문 용어로 바꾸면 구도자다. 구도자는 도()를 찾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또는 하나님 나라를 찾는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여기에 온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는 사람이다. 돌아서는 삶을 회심(메타노이아)이라고 한다. 한 번의 회심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 기독교인은 길을 가는 태도로 살아간다. 구도자들은 이런 구도를 일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구도적 삶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걸음은 멈춤이 없다. 이는 곧 우리의 삶에 완성이 없다는 뜻이다. 푯대를 향해서 나아갈 뿐이다. 이런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뒤에 있는 것은 버린다. 나이가 들면 어린 시절에 좋아하던 장난감에 관심이 가지 않는 것과 같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도사들이 수행 과정에서 행하던 전통의 하나는 순례다. 지금은 산티아고 순례가 가장 유명하다. 순례는 나그네로 사는 삶을 몸으로 훈련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체력에 맞도록 200를 가거나 500, 또는 그 이상을 갈 수 있다. 순례 과정은 아주 단순하다. 그냥 걷는다. 무상무념에 떨어질 수도 있고, 주변의 경치에 몰두할 수도 있다. 극단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순례 행위도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 볼 수 있는 삼보일배나 오체투지가 그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순례 중에 일상의 일을 모두 잊는다는 점이다. 그는 오직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향해서 걸음을 내디딜 뿐이다. 그 사이에 숨 쉬고, 일용할 양식으로 배를 채우고, 배설하고 잔다. 인간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활동을 한다. 자식과 사업 등을 걱정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삶이 산티아고 순례와 같은 나그네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지난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직 앞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게 쉽지 않다. 기독교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에 묶여서 산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다. 높은 수준의 신앙에 들어간 사람은 현재 놓인 상황과는 별개로 좀 더 가볍게, 그러나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겠지만, 낮은 수준의 신앙에 머문 사람은 반복해서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한 단계만이라도 위로 오르기 원한다면 이런 과정을 이미 겪은 스승을 만나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성경 기자들이 우리에게 스승이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그들은 우리에게 거룩한 멘토다. 이번 베드로전서 공부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으면 한다.

본문은 나그네인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2절에서 정확하게 묘사한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지금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 번역은 은혜롭게 들리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공동번역이 낫다. “여러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세우신 계획에 따라 뽑혀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분의 피로 죄가 씻겨진 사람들입니다.” 마틴 루터 번역 성경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그네인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서 선택되어서, 성령을 통하여,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하시고 피를 뿌리심으로써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장에서 순종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지 아니면 나그네에게 연결되는지,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루터 성경과 KJV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 게 맞다. 교리적으로 볼 때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의 순종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었으며라는 공동번역은 오역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흔히 들었던 이야기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믿는 사람이 될지 아닐지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면 개인의 책임은 면제된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표현은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예정론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기계적인 예정론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실종된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표현은 신앙의 신비를 가리킨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물론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도 대단히 특이한 사건이기는 하다. 친구를 따라서 왔든지, 모태 신앙인이든지, 스스로 선택했든지 어떤 경우라도 다 신비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특별한 일이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본문은 이를 미리 아심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셨다는 말은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 있다는 뜻이다. 놀라운 고백이다. 지금 우리의 삶이 무조건 화려하다는 뜻이 아니다. 여러 가지로 곤란한 지경에 떨어질 수도 있다. 벧전의 수신자들은 특히 어려웠다. 그들은 박해를 일상적으로 받아야만 했다. 학자들에 따라서 네로 황제 시대라고 말하기도 하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라고도 한다. 두 황제 모두 기독교를 박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이미 하나님이 아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아셨다는 말은 자신들의 삶이 내면적으로 볼 때 최고로 아름답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런 신앙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그 사람의 영성에 달려 있다.

인사말의 마지막 문장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이다. 은혜와 평화는 물론 하나님이 주신다. 세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에서 은혜와 평화를 찾으려고 한다. 가장 세속적인 방식은 돈이 그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지 못한다(6:24)는 주님의 말씀을 자주 들었지만, 대다수 사람은 어중간하게 걸쳐서 살아간다. 한편으로는 그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현대의 삶을 돈이 완벽하게 장악했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하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공고히 지배하는 21세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점에서 옛날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투쟁적으로 살아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하나님만이 은혜와 평화를 주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어야 한다. 붙든 사람은 고단한 세상살이에서도 기독교인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벧전 기자는 인사말을 끝내고 5장에 걸쳐서 기독교인다운 삶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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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2019.09.06 02:00:37

(교정입니다. ^^;;)

두 번쨰문단 셋째 줄a "그냥 걷을 뿐이다."-------- 그냥 을 뿐이다.

[레벨:23]브니엘남

2019.09.29 09:42:09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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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8일(토)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오해받기 쉽다. 이걸 실제로 벌어진 이야기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착각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다. 비유는 비유로 이해해야지 사실로 보면 안 된다. 비유는 한 가지 가르침만 지시한다. 여기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에서 죽음 이후의 운명에 대한 가르침을 찾으려고 한다. 죽으면 곧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말이다. 이 비유는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냉담신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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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8일(목) 냉담 신자 특별한 이유 없이 오랫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는 신자들을 성당에서는 냉담자, 또는 냉담신자라고 한다. 신앙이 식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신앙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다. 냉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결국은 신앙을 완전히 놓치게 될 것이다. 개신교회에서는 냉담신자를 어떻게 부르는지 아직 의견이 모아진 게 없다. 그냥 교회를 쉬는 신자, 시험에 들린 분이라고 한다. 그 의미는 가톨릭의 냉담신자와 비슷하다. 왜 냉담신자가 되는가? 그 이유는 각 사람의 숫자만큼 여러 가지이다. 그들이 신앙을 포기...

어린왕자(3), 2월14일(목)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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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착한 비행기에 대해서 서로 말을 나누다가 왕자는 화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럼 당신도 하늘에서 왔군요! 어느 별에서 왔지요?” 화자는 다시 왕자에게 어느 별에서 왔냐고 묻는다. 이후로 <어린왕자>는 왕자가 살던 별과 왕자가 여행한 별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어느 별에서 왔냐는 질문은 단순히 동화적인 발상이 아니라 아주 실질적인 거다. 사람을 비롯해서 지구의 모든 것들은 다 별에서 왔다. 놀랍기도 당연하기도 하다. 우주의 먼지 구름이 별이 된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다시 사라진다. 하늘의 수많은 ...

3월8일 예수님의 축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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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8일 예수님의 축사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막 8:6) 막 8:6절에 묘사된 내용은 막 6:41절의 그것과 거의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나누어’ 주라 하시자,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림은 바로 예수님이 잡히시던 마지막 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만찬 모습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축사와 떼어냄과 나눔...

예수의 얼굴, 1월21일(월) [8]

  • 201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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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전 영국의 어떤 연구소에서 예수의 얼굴을 CG로 복원한 적이 있다. 2천 년 전 유대인 노동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왔다. 실망한 분들도 많았다. 기존의 명화로 알려진 유럽의 잘생긴 남자 모습과는 달라도 꽤나 달랐다. 그런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 또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실제의 외모가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체를 가리킨다. 그 인격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의 운명을 담지하고 있는 실존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

변화산 사건, 2월11일(월)

  • 2013-02-11
  • 조회 수 4189

간질병 아이의 치료 사건은 그 앞에 있는 변화산 사건과 직결된다. 간질병 아이 사건은 변화산 사건을 부연해서 설명한 거나 다를 게 없다.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을 때 용모가 변화되었다고 한다. 옷이 흰색으로 광채를 냈다. 이런 변화는 시내산에 올랐던 모세의 경우와 비슷하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출 34:29). 복음서 기자는 모세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이 변화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면서 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

5월18일- 일상의 힘 [2]

  • 2006-05-18
  • 조회 수 4187

2006년 5월18일 일상의 힘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막 1:16)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과 시몬 형제와의 만남을 아주 간단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고기를 잡고 있던 그 형제를 보았다고 합니다. 본문이 정확하게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봐도 예수님은 매일 새벽마다 그 해변을 산책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시몬 형제를 한 두 번 본 게 아닐 겁니다. 어쩌면 그들...

김동건 박사의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 [7]

  • 2011-04-09
  • 조회 수 4181

오늘은 그대에게 책 한권을 소개하겠소. 김동건 박사의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요. 우리의 영성을 위해서 좋은 책 읽기보다 우선하는 게 없다는 사실은 내가 누누이 말한 것이오. 그대도 동의하리라 믿소. 내가 따로 서평란에 모아두기 위해서 쓴 글을 아래에 다오. 그것을 오늘 매일묵상에 대신하겠소. 좋은 주일을 맞으시오. 김동건 박사의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 영남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동건 박사께서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라는 책을 최근에 출간했다. 부제는 “12개의 주제”다. 부제대...

예수 수수께끼 [4]

  • 2013-11-18
  • 조회 수 4174

11월18일(월) 지난 수요일 공부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신약성서는 예수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이었다. 수수께끼는 비밀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비밀이었다. 추종자들만이 아니라 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은 수수께끼와 같은 인물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은 뒤에 다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신 적이 있는데, 예수님의 정체가 당시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제자들과 일부 추종...

목사공부(74)- 성찬의 의미

  • 2014-07-03
  • 조회 수 4161

성찬의 의미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에는 양을 잡는 전통이 있다. 양은 사람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바치는 희생제물이다. 초기 기독교는 유월절 만찬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진 양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빵과 포도주에 얽힌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피다. 이들은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모일 때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했다. 성찬의 의미는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에서와 같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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