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5일- 하나님의 나라 (2)

조회 수 4242 추천 수 27 2006.05.05 22:57:06
2006년 5월5일- 하나님의 나라 (2)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쿠어트 알랜드(Kurt Aland)외 몇 학자들이 편집한 헬라어 성서(THE GREEK NEW TESTAMENT)의 부록으로 실린 헬영 사전을 보면 ‘바실레이아’를 이렇게 영역합니다. reign, rule, kingdom, domain. 우리말로는 통치, 왕국, 영역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전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공간적인 영역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작동하는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공간적인 한계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주로 통치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뜻입니다.
‘나라’를 ‘다스림’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실체론적 형이상학을 극복해야 합니다. 실체론적 형이상학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플라톤의 이데아였든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었든지, 서양 사람들은 그런 본질적인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실체론적 형이상학에 의하면 ‘나라’는 분명히 실체(substance)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흡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서 간다고 생각하는 그런 천당과 비슷한 실체 말입니다.
과연 그런 실체가 궁극적으로 존재할까요? 이미 현대 물리학은 그런 실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인 원자가 실체라는 생각은 이미 깨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이론’이 가리키고 있듯이 양자(quantum)의 세계에서는 물질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양자가 관찰자에 따라서 계속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그 양자를 측정해낼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양자의 객관적인 측정이 불가능하다면 실험을 통해서 동일한 결과를 얻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자연과학적 이론은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물리학은 이제 정신과학과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질과 정신이 완전히 구분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이 옆으로 많이 흘렀군요. 제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큰 그림으로만 본다면 대충 맞는 이야기일 겁니다.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옵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자기의 주관에 따라서 재단하거나 소유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마음을 열어두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의 다스림, 그 통치가 우리 손에 간단히 포착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 방식은 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역사가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의 원리로 진행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도 경제적인 힘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암묵적 합의에 의해서 오늘 우리의 삶에서 최고의 이념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에 관심을 기울인 성서 기자들은 역사를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성서 시대에 가장 강력했던 왕, 군주, 제국, 명예와 권력은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지적합니다. 가장 단적인 예가 바로 오합지졸에 불과한 히브리인들은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넜지만 그 당시 막강 군사력을 자랑하던 파라오의 기마병들은 물속에 장사된 사건입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나요? 여전히 제국주의적 질서에 지배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전히 세속적인 경제구도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소유할 수 있으려니 하고 생각하는 건 아닐는지요. 그래서 그런 영역확보에 우리의 모든 삶을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나요? 아니 우리가 그 하나님의 다스림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다스림에 관해서 관심조차 없을지 모릅니다. 이미 우리는 소유 중심의 삶의 원리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임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아무나 인식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이해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큰 오해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일종의 권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킨 지도자들이 행사하는 교권은 하나님의 통치를 무력화 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관한 예는 제가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웬만큼 아는 분들은 대충 눈치를 채고 있을 겁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데 관심을 두어야겠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왔다는 그 하나님의 다스림 말입니다. 음악가는 음악의 세계에서만 자기의 존재 근거를 찾을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의 다스림에서만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레벨:6]한밀

2011.02.27 07:23:54

목사님,

 

이제 여기까지 왔습니다.

발자국을 남겨야할것 같아서...

 

로마의 통치가 한창이던 상황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 예수님

그의 메세지는 정치적이며, 상황적인것 같습니다.

 

종말적인데 그치지 않는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의 삶을 통해 그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그의 사역을 통해 보여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계속 걸으려고 합니다...

 

목사님도 힘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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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18일 일상의 힘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막 1:16)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과 시몬 형제와의 만남을 아주 간단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고기를 잡고 있던 그 형제를 보았다고 합니다. 본문이 정확하게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봐도 예수님은 매일 새벽마다 그 해변을 산책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시몬 형제를 한 두 번 본 게 아닐 겁니다. 어쩌면 그들...

김동건 박사의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 [7]

  • 201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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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수수께끼 [4]

  • 2013-11-18
  • 조회 수 4151

11월18일(월) 지난 수요일 공부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신약성서는 예수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이었다. 수수께끼는 비밀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비밀이었다. 추종자들만이 아니라 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은 수수께끼와 같은 인물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은 뒤에 다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신 적이 있는데, 예수님의 정체가 당시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제자들과 일부 추종...

목사공부(74)- 성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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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의미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에는 양을 잡는 전통이 있다. 양은 사람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바치는 희생제물이다. 초기 기독교는 유월절 만찬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진 양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빵과 포도주에 얽힌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피다. 이들은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모일 때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했다. 성찬의 의미는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에서와 같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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