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7일, 수
가벼움에 대해
‘가벼움’ 하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생각난다. 일반적으로 존재의 가벼움은 부정적인 의미이지만 쿤데라의 소설은 반대다. 주인공의 행태는 키치적이다. 여기서 키치적이라는 말은 통속적인 것을 통해서 오히려 고귀함을 드러내는 태도다. 고귀함을 나타내려고 의도하는 게 아니고 통속적인 것 자체로서 존재의 의미를 붙든다는 의미다. 쿤데라는 주인공의 통속적인 행태를(주로 성적인 것) 통해서 오히려 인간의 존재론적 토대를 말하고 있다. 가벼움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서 남아 있는 이미지만으로 설명했다.
율법주의는 무거움에 중심을 두는 신앙 행태다.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많은 짐을 지는 것이다. 교회 봉사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다른 이들에 비해서 훨씬 더 도덕적으로 산다. 청교도 신앙이 이를 대표한다. 이런 신자들이 많은 교회는 부흥한다. 문제는 그들에게 영혼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태가 무엇인지를 본인들은 잘 모른다. 남의 교회를 말하는 게 그렇지만 ‘사랑의교회’ 신자들은 교회 수호파와 개혁파가 오래 싸우고 있다.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 명예와 재산은 그들의 영혼에 짐이다. 그걸 지키려다가 더 중요한 영혼의 자유를 잃는다. 많은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은 거기에 퍼질러 앉아 이전투구 하는 게 아니라 먼저 짐을 쌀 것이다. 우리 인생은 그런 일에 시간을 쓰기에는 너무 짧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안식을 주마고 약속하셨다.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게 복음이다. 오늘의 주제로 바꾸면 ‘가벼움’이다. 목사의 경우로 말하면, 예수는 목사들에게 목회의 짐에서 벗어나서 안식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수많은 목사들이 목회의 짐을 지려고 애를 쓴다. 그걸 소명으로 착각한다. 그건 소명도 아니고 십자가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율법에 얽매임이든지 다른 한편으로 자기 실현에 대한 집착이다.
예수님이 이미 자유케 하는 복음이 되셨는데도 우린 여전히 율법속에 살고 있으니.. 말이죠.
다비아 동영상이 안되서 유튜브로 강의를 듣는데..
해야하는 율법에서 해도 되는 허락받음으로 자유와 은총을 거져받았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허락과 은총이 연결이 되었어요.
해도되는 허락받음.. 이것이 은총임을 ..
우와~~ 대박이지 않아요?ㅎ
그래서 요즘엔 ''해도된다''를 모든것에 적용시켜서 사용하는 편입니다.
은총속에 사는 기쁨이 충만한 요즘입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추석 명절 되십시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인사 드리네요. 건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