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교회개혁

조회 수 1243 추천 수 0 2017.06.13 22:12:47

613,

교회 개혁

 

오늘 저녁 7시에 대구기독교 인문학교 주관 모임에서 교회 개혁과 하나님 나라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 그쪽으로 보낸 원고와는 상관없이 내가 따로 요약해간 내용은 아래와 같다.

 

금년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라서 교회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한국에서 교회개혁이라는 말은 이미 힘을 잃었다. 한쪽에서는 개혁에 전혀 뜻이 없고, 다른 한쪽에서는 뜻과 의지가 있기는 한데 힘이 없다. 주로 대형교회에 속한 이들이 전자이고, 소형교회에 속한 이들이 후자다. 대다수는 무력감에 빠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교회개혁을 말해도 효과가 없다. 그래도 선지자의 영성으로 꾸준히 개혁을 외쳐야 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다만 개혁을 외친다고 해서 당장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작은 어려움에 실망하지 않고 개혁의 길을 갈 수 있다. 구약 선지자들의 선포가 실제로 변혁과 개혁으로 이어진 적은 역사적으로 많지 않다. 그냥 그렇게 선포하다가 대다수는 아무런 결실도 못보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신약에서 중요한 인물인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유대교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과 대립에서 밀려나 아무런 결실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역사의 거대한 수레가 바울을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인 인물로 살려냈다. 우리의 개혁의지보다 하나님의 섭리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도 이와 다를 게 없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모범적인 사례로 드는 이들도 있다. 그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개혁이 아니라 사회개혁이라는 점에서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는 중세라는 패러다임을 종식시킨 인물이다. 그래서 지난 2천년 유럽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게 세상을 변화시킨 인물로 인정받는다. 우리가 지금 루터의 종교개혁의 태두로 추앙하고 있지만 그 사람 혼자서 그런 엄청난 역사를 만들어낸 게 아니다. 그리고 그가 당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낸 것도 아니다. 만약 그 지역의 영주인 프레드릭 선제후가 철저하게 지원하지 않았다만 루터는 종교재판을 받고 귀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손에 희생당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가 받은 스트레스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매일 맥주를 1천 씨씨 이상을 마셨다고 한다. 그래서 말년에 비만이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지 그는 알코올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사회적인 환경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독일의 중산층이 대거 늘었다. 중산층은 개인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정치 종교적인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확보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지지를 통해서 루터가 로마가톨릭에 저항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잘 알려진 인쇄술의 발단도 한몫 했다. 루터의 저술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그게 여론이 되고, 그 여론을 영주나 주교들이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의 변화가 먼저냐, 세상의 변화가 먼저냐 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다르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세상의 변화가 먼저다. 그런 변화가 없으면 교회개혁은 지난 구약과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희생자만 나올 뿐이다. 크게 보면 예수도 그런 희생자의 한 사람이었다.

 

개교회주의

오늘 한국교회는 루터 버금갈 정도의 개혁은 꿈도 꾸지 못한다.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한국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주변부로 밀려난 상태다. 교회에 구조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너무 많아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개교회주의다. 각각의 개별 교회가 생존 경쟁에 몰두하고 있으니 교회 개혁이라는 말에 관심을 기울일 틈이 없다. 성직자 정치로 인해서 교회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로마가톨릭교회를 비판하지만 개신교회의 개교회주의는 성직자 정치보다 더 나쁘게 작용한다. 이런 개교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교회 개혁은 요원한 일이다.

 

당회제도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의 패권도 걸림돌이다. 어떤 제도든지 그것이 관행으로 자리 잡으면 왜곡의 길을 면할 수가 없다. 칼빈이 시작한 장로제도가 당시에는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단순히 교권 행사 기관에 불과하다. 당회 제도를 파격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교회 개혁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회 정책을 결정하는 노회나 총회에 참석하는 대의원들은 대부분이 남자 목사와 장로들이다. 여자들이 허용되는 교단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교단에서도 여자들의 교회 정치 참여는 미미하다. 여자 노회장이나 총회장이 우리나라 교회 역사에 나온 적은 아주 드물다. 내가 오늘 전해 듣기로는 기장과 통합 측에서 노회장 한 두 명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교회 전체로 보면 거의 무시해도 좋은 수준이다.

 

신학교 문제

신학교가 대부분 교단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도 큰 문제다. 교수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자칫 하면 총회 파송 이사들로 구성된 이사회에 호출당해서 해명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루터가 나올 수 없다. 구조적으로, 신앙 체질적으로!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개신교회가 개혁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둘 중의 하나다. 첫째, 평신도와 목회자들의 생각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지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 운동과 같은 어떤 혁명적 사건이 필요하다. 이게 힘들 것이다. 지금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의 영적 상태를 보면 답이 나온다. 생각이 별로 없거나 모태신자이거나 교회에서 한 자리 할 마음을 먹거나 관성의 법칙에 따르는 것뿐이다. 또는 아무런 리더십도 없이 불평불만만 쏟아내면서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들이다.

둘째, 현재의 교세가 반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다. 완전한 위기를 가리키는데, 위기가 곧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때는 빨리 오지는 않는다. 부자가 말해도 3대 간다는 말처럼, 한국교회는 지금 상당한 인적 물적 토대를 확보하고 있어서 현재 60대 이상 되는 분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는 그런대로 유지될 것이다. 앞으로 30년 후는 상황이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교회가 개혁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에서 개혁되는 게 최선이다. 이게 딜레마다. 현재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개혁은 불가능하고, 개혁이 되려면 현재 체제가 허물어져야 한다.

뭐가 문제냐, 뭐가 개혁되어야 하느냐, 하는 질문도 가능하다. 이 어려운 시기에 이런 정도나마 교회가 굴러가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살면 된다. 이제 루터가 1520년에 연달아 쓴 세 편의 논문을 소개하면서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구체적인 사안을 몇 가지만 짚겠다.

 

1)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루터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에 있는 세 가지 담을 비판한다. 첫째는 세속 지위 위의 영적 지위라는 담이고, 둘째는 성서해석에 대한 교황의 우월권이라는 담이고, 셋째는 공회 소집권에 대한 교황의 독점권이라는 담이다. 루터는 세 가지 담이 문제라는 사실을 짚는다. 세속 직업이나 성직이나 모두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이라는 점에서 질적인 차이는 없다. 여기서 루터는 만인제사장직을 거론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제자장이지 특정한 사람만 제사장이라고 할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목사를 여전히 특별한 존재로 여긴다. 보통 사람과 달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이다. 모든 직업이 다 소명이다. 그 소명은 한 순간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평생을 걸쳐서 깊어져야 한다. 오늘 목사들은 소명을 특권으로 여긴다. 그것은 루터가 표현한 담이다.

 

2) 교회의 바벨론 포로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7가지 성례전에서 세례와 성찬(참회 포함)만 인정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지금도 7가지 성례전을 유지한다. 각각의 종파가 나름으로 성례전을 지키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성례전을 성례전답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 한국개신교회는 성례전 문제에서 형식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성찬의 형식주의는 복음의 본질을 위협할 정도다. 더 크게는 예배의 예전도 훼손되었다. 예전예배와 성찬식의 회복이 한국교회 개혁의 핵심이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

루터는 기독교인은 (내면적인 믿음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외면적인 행위에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다.”(고전 9:19)는 말씀에 근거해서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칭의 안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낭만적인 심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실질적인 삶의 투쟁을 포함한다. 루터가 교황의 교권과 목숨을 걸고 투쟁할 수 있었던 힘이 거기에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신>의 원제는 <순종과 항거>. 본회퍼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함으로써 히틀러에 항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값싼 은혜에 떨어지거나 율법주의에 떨어져 있는 상태다. 특히 율법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헌금 행위다. 십일조를 비롯해서 온갖 종류의 헌금이 신앙의 척도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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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홀리아빠

2017.06.14 11:19:28

오랜만에 목사님 뵐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ㅠ

아쉽습니다.ㅠ 강의가 있으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ㅠ 심지어 집과 가까웠는데요..ㅠ


교회 현장 상황을 그대로 이야기하시니 시원하면서도 답답합니다.ㅠ

저 하나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음을 느낍니다.

커다란 벽 앞에 서있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기도 합니다.

대단한 개혁자 처럼 말하지만 실상 미비한 저의 실존때문에 부끄럽기도 합니다.

신학운동을 펼치고 싶지만 관심도 문제의식도 없는 목회자 사이에서

그냥 묻어가는게 현실입니다.

목사님 글에서처럼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묵묵히 가야하겠지요..?ㅠ


목사님 강의로 모실 수 있는 정기적인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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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7.06.14 21:02:09

생각이 있는 젊은 목사들이 지금의 이 척박한 교회 현실을

어떻게 버텨낼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합니다.

힘을 내서 가는데까지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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