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5일, 토
종말의 선취
내 설교가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설교자가 뭔가를 명확하게 알고 설교하면 어렵게 들리지 않는다. 내 설교가 어렵다는 말은 내가 뭔가를 명확하게 아는 게 아니라는 증거다. 이런 문제가 죽기 전에 해결될지 모르겠다. 가능한 설교를 쉽게 할 필요가 있는데도 그게 잘 안 된다. 지난 설교에도 그런 대목이 있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려면 역사를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활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앞당겨져서 유일회적으로 일어난 생명 사건이다.’ 이런 말은 관념적이어서 전달이 어렵다. 어려우면 그런 대목을 말하지 않는 게 좋다. 그래도 그런 시각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런 말을 하고 말았다. 여기서 잠시 보충해야겠다.
종말의 선취(先取)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종말을 미리 당겨서 살아내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기계적인 원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이게 말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원리를 뛰어넘어야만 성립된다.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한다. 이건 단순히 신앙적인 수사가 아니라 아주 명백한 세계관이다. 창조와 종말을 고유한 능력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지금 우리에게 오지 않은 종말까지 이미 통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종말이 현재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우선적이라는 말이 된다. 이게 말이 될까? 이걸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다음의 한 가지만이라도 생각해두자. 이 세상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고고학, 우주물리학 등등, 그 어떤 학문으로도 다 해명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현재가 미래이고, 미래가 현재일 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