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9일, 수
‘본다고 하니...’
시각장애인을 고친 예수를 바리새인들을 불편하게 여겼다. 예수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치료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옳고 그름을 ‘본다’고 하니 오히려 죄가 있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안다는 뜻이고, 죄가 있다는 말은 못 본다는 말이다.
사람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제한적이다.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인식하는 것은 주어진 범주 안의 것이다. 일단 시각과 청각을 보라. 너무 먼 것은 못 보고, 너무 작은 것도 못 본다. 코끼리 털 한 자락에 붙어 있는 미생물은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못 보는 거와 같다. 주파수가 너무 낮거나, 너무 높은 소리도 못 듣는다. 개들은 인간보다 청력이 훨씬 뛰어나다. 감각적인 것만이 아니라 개인의 운명과 사회 현상도 대충만 알 뿐이지 정확하게 아는 게 아니다. 판사가 오심을 내려서 억울한 사형수가 생기는 일이 드물지 않다. 자기의 인식 능력을 너무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목사들도 뭔가를 자신들이 ‘본다’고 확신한다. 과대망상에 떨어지지 않는 목사라면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만은 안다. 그걸 신자들이 알면 권위가 손상된다 생각해서 그냥 붙들고 있을 뿐이다.
목사를 비롯해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인식과 믿음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확신이 없으면 신앙이 성립되지 않는다. 인식의 한계와 믿음의 확신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바울도 자신의 인식을 늘 제한적인 것으로 인정했으면서 동시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자신의 운명을 걸 정도로 확신이 있었다. 이와 연결해서 바르트의 언급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믿음은 이성을 조명하다. 인간은 조명된 이성 안에서 자유롭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며, 그렇게 하여 자신의 고유한 현존재의 의미 그리고 모든 사건의 근거 및 목적의 의미를 확신하게 된다.”(교의학 개요, 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