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5일, 수
레퀴엠
지난 설교에서 겔 37:6절을 인용하면서 베르디의 <레퀴엠>을 듣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공동번역으로 인용한 것을 다시 여기 싣는다.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진혼곡으로 번역되는 레퀴엠은 죽은 이의 혼을 위로하는 미사곡을 가리킨다. 이게 개신교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개신교회 신앙은 사람이 죽으면 곧 그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로마가톨릭 신앙에서는 연옥 교리가 있어서 그곳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영혼은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다. 비록 그런 신학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개신교회가 레퀴엠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모든 인간은 종교와 인종과 빈부 차이에 상관없이 궁극적인 위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레퀴엠은 죽은 영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노래다. 죽은 이가 감당해야 할 문제는 우리가 상상할 뿐이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감당해야 할 문제야말로 궁극적인 위로를 필요로 한다. 마른 뼈가 된다는 사실 앞에서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요즘 4월의 봄꽃이 지천이다. 오늘도 교회에 다녀오는 길에 눈발처럼 휘날리는 꽃잎들을 보았다. 우리 집 마당에도 목련꽃, 개나리, 앵두꽃이 피었고, 옆집에는 벚꽃이 막 피기 시작했다.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낙화는 더 처량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게 순리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든 이들은 레퀴엠이 필요하다. ‘살리는 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