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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7일, 금
예수 사랑
어제 묵상의 마지막 질문은 ‘예수와의 일치가 실제로 가능한가.’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그 답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십자가의 예수는 모든 버림받은 사람을 대표한다. 거기서부터 부활 생명이 시작되었다. 판넨베르크의 표현처럼 예수 십자가 이후 십자가와 같은 운명에 떨어진 어느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게 되었다. 이걸 실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의 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 치고 이런 답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답의 실체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대개는 상투적으로만 경험한다.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하에는 부활의 예수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관복음서에는 없는 전승이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었다. 예수와의 일치가 결국 그에 대한 사랑에 달려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사랑은 생명의 능력에 휩싸이는 경험이다. 그게 열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단순히 교리로서가 아니라 예수를 사랑할 때만 우리는 그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만 우리는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