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6일- 해 질 때

조회 수 4015 추천 수 22 2006.06.16 23:13:52
2006년 6월16일 해 질 때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막 1:32)

시몬의 장모는 이제 온전한 정신을 차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는지는 볼을 보듯 분명합니다. 이 동네 저 동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겠지요. 사람들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가 “저물어 해 질 때”라고 합니다. 야간 조명이 거의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 해가 진다는 건 낮에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접어야 할 때입니다. 낮과 밤의 경계인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에게는 일거리가 많아진 셈입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해 질 때”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낮의 역동성과 밤의 평화와 달리 이 저녁은 저에게 신비롭게 다가왔습니다. 가정환경이 좋지 못했던 까닭이겠지만 집보다는 밖으로 쏘다니던 일이 많았던 어린 시절의 저에게 해가 꼴깍 넘어간 직후 짙어지는 노을과 침침한 색깔로 바뀌는 사위(四圍)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천호동은 농촌과 거의 다를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논, 밭, 들판, 숲, 개천, 과수원과 함께 살았습니다. 혼자서 들과 숲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가 온 세계가 붉게 변하는 장면 앞에서 충격을 받곤 했습니다. 이런 충격은 숲만이 아니라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한창 정신없이 뛰어놀던 동네 마당과 집들이 저녁노을에 반사되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런 어릴 때의 경험이 어렴풋한 ‘존재’의 경험이었겠지요. 무엇이 ‘있다’는 걸 경험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느낌은 제 의식 깊은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우주 물리학적으로 해가 진다는 말은 그렇게 옳은 건 아닙니다. 해는 지는 게 아닙니다. 해는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고, 대신 지구가 시계 바늘 방향으로 돌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고대인들에게 해가 지고 다시 뜬 현상은 신비로움 자체였습니다. 수많은 고대 종교가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는 건 당연합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다른 종교처럼 태양 자체를 숭배한 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한 야훼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그리스도교 역시 태양 빛을 중요한 신앙적 메타포로 받아들였습니다. 주일을 지킨다거나 12월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전통,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요한의 해명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오늘 우리는 고대인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많은 물리학적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정보라는 것도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놓고 본다면 거의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고대인들에게 비해서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물리학적 정보의 우위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정보가 우리의 삶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 걸까요? 신비 경험이 축소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대인들보다 미숙한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인간 언어를 뛰어넘는 ‘거룩’의 영역을 놓치고 사는 우리에게 삶은 점점 건조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거룩은 주술이 아니라 존재의 신비입니다.
저는 고대인들의 삶과 우리의 어린 시절이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는 건 많지 않아도 근본에 대해서 우리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제 어린 시절의 ‘세계’는 마치 요정들이 노는 숲속 같았습니다. 세상을 아는 지식은 없었지만 세상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린 시절 제게 충격적이었던 “저물어 해 질 때”가 그립습니다. 굳이 해 질 때만이 아니라 제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바로 그런 환희와 놀라움으로 가득했으면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은총이 넘치시기를...

주님, 존재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아멘.

profile

[레벨:16]seyoh

2006.06.17 23:52:24

정목사님의 '저물어 해질 때에' 에 관한 한줄 묵상을 읽으니 전에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했던 부분이 생각납니다.
그부분을 잠시 옮겨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세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리고 약한 자와 병든 자를 고치는 치유사역을 하셨습니다. 본문도 그 중의 하나, 치유사역을 하신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다가 유독 제눈을 끄는 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첫부분 “저물어 해질 때에”란 부분입니다. 마가가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종이도 귀하고 그럴 때인데 글자 한 자라도 줄일 것이지 굳이 그렇게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같은 의미의 말을 되풀이 하여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해가 진 후”라던가 “그날 밤에” 라고 기록하면 될 터인데 라고 생각을 하다가, 아니지 … 성경의 기록은 말 한마디가 다 그 뜻이 있지..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차분히 검토해보기로 했습니다.

개역한글에는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번역을 해 놓았고 아가페 쉬운성경을 찾아 보았더니 “그날 저녁 해가 지자” 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날이 저물었을 때에”라고 내가 맨처음 먹었던 생각과 같이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또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찾아 보았습니다.
“해질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히 그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눅 4:40) )
”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마 8:16)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그저 평범하게 해질 적에, 해가 질때, 저물매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마태 복음에 비해서 마가는 유달리 ‘ 해가 진 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마가는 해가 진 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을까 ? 해가, 해가 지자… 해 ..혹시 이 말이 그냥 단순히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그 무언가 해와 관련되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 소설식으로 말하면 복선이 깔린 단어이다. 무언가 있다 . .그렇다면 그게 무엇일까?
그래서 다시 한번 마가복음 1장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1절에 와서 제 눈이 다시 한번 멈췄습니다

“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
안식일이라 .. 이 말에 여러분 일단 마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 특히 신약에서- 안식일이란 시간이 나타나면 그 뒤에 무언가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다면 안식일과 이 ‘해가 진 후에’ 라는 말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 그래서 우선 그 안식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 21-22) 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해주시고 ( 23- 28)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 걸린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주셨습니다.( 29-31)

그렇게 21절로부터 31절까지가 그날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32절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면 32절도 역시 같은 그 안식일에 일어난 일인가?
저물어 해질 때에 …. 그렇지 같은 날, 그러니 안식일이지 라고 생각하다가 … 이게 유대인의 날짜이니 …우리나라식으로 계산으로 하면 안되지 ..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식의 계산으로는 분명 같은 날인데 그런데 유대식으로 보면 이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시간 계산으로 따져보기로 했습니다. 유대인의 시간 계산은 해가 진 후 하루가 시작되어서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를 그날 하루로 계산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식으로 보면 해가 져도 그날, 같은 날인데 비하여 유대인들의 날짜 계산법에 의하면 해가 지면 이제 다음 날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종합해서 32절을 읽어보니 32절의 “저물어 해질 때에”라는 말은 그 날, 안식일이 지나고 … 안식일의 해가 떨어지자 마자 … 이런 말이 되겠고 그렇게 안식일이 지나니 병들고 귀신들린 백성들이 모여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병자를 고치지 못하니 해가 지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해가 지니 비로소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마가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분석이 되니까 그제서야 마가가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기록한 그 행간에는 어서 안식일이 지나 갔으면 하는 그 백성들의 애타는 심정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그렇게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적어 놓아 그말을 통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해가 지자 비로소 모여 들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 ? 해가 쨍쨍 비칠 때 와서 고쳐도 시간이 모자랄 터인데 안식일이라는 율법에 잡혀 해가 떠 있을 때에는 나오지 못하고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가 해가 진 후 비로소 나올 수 밖에 없는 그 백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마가는 '저물어 해질 때에' 라는 말 속에 담은 것입니다. (이하 생략)>

[레벨:8]김인범

2006.06.17 08:16:53

아, 그렇게도 해석이 되는군요. 그 간단한 표현 속에서 그런 깊은 의미를 살려 내시는군요.
정 목사님의 어릴적 기억과 함께 느끼는 그 표현의 의미도
오 목사님의 분석적 연구로 찾아내는 그 표현 속에 담긴 의미도
성경을 접하면 느끼게 되는 또다른 묘미인 것 같고
우리 하나님의 그 풍성하심과 은혜로우심의 또 한 부분을 맛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안식일에 주인공들이 우리인데 깨닫지 못하면 안식일에 종들로서 사는
그 안타까움을 지적하므로 우리를 깨우치시는 저자의 의도도
일상의 평범한 삶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그러나 분명 풍성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또다른 한 장면으로
뉘엿뉘엿 저물어 가며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순간 황홀해지는 저녁,
끝이 아니라 뭔가 상상이 않되는 시작을 보는 것 같은 그 광경을
다시한번 떠 올려, 요즘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왠지 모를 안락함을 새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굴뚝들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흰 연기들과 함께
서서히 그러나 진하게 풍기는 밥짓는 냄새가 그 저녁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군요.
'저물어 해 질때....'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6.17 23:33:55

오세용 목사님,
성서를 통시적으로 읽고 계시는군요.
좋은 착상인 것 같습니다.
그 주제에 접근해 들어가는 과정도 좋구요.

김인범 목사님,
굴뚝과 연기, 밥짓는 냄새,
멋진 묘사군요.
그런 한 순간이 영원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매실주 file [3]

  • 2013-06-19
  • 조회 수 4035

며칠 전 매실주를 담갔다. 진작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 뭐 하는 일도 없이 바쁘게 지내다가 더 늦으면 곤란할 거 같아서 마트에 들린 김에 한보따리 매실을 샀다. 보통은 청매실로 담군다고 하지만 약간 익은 걸로 하는 게 향이 더 난다는 말을 듣고 이번에는 익은 매실로 담갔다. 익은 매실이 더 싸다는 것도 이런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매실 담구기는 워낙 간단했다. 물로 씻어 말리는 게 다였다. 다음에는 매실 1킬로에 소주1리터 비율로 병에 넣으면 끝이다. 보통은 30도 짜리 소주를 사용하는데, 이번에 들린 마트에는 과일주 용으로...

하나님 나라(37) - 종말론적 윤리-

  • 2010-06-19
  • 조회 수 4034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근거한 예수의 교훈이 오늘 우리의 윤리적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이 대답은 윤리의 근거라는 철학적 문제가 비록 암묵적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종말론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정확히 논증해야만 한다. 이 논증이 가능하다면 그리스도인이 그 당시에 만인 구원을 대망하다가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불행한 일은 아닐 것이다. 시간표는 정정되겠지만 그 관점은 거부될 수 없다. 물론 예수의 윤리적 교훈을 시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세대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교...

5월9일 하나님의 나라 (6) [1]

  • 2006-05-09
  • 조회 수 4025

2006년 5월9일 하나님의 나라 (6)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비극이며 불행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간혹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를 언급하지만 실제로 그 하나님의 나라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그 의미를 되돌아보고 해석하고 선포하는 설교자들이 있나요? 하...

앵글 작업, 4월11일(목) file [5]

  • 2013-04-11
  • 조회 수 4022

아파트에 살다가 일반 주택으로 이사를 오니 물건들을 정리하는 게 만만치 않다. 베란다가 없어서 물건을 둘 데가 크게 부족하다. 다용도실과 세탁실에 약간의 공간이 남아 있어서 거기에 선반을 만들어 세우기로 했다. 인터넷을 통해서 정보를 알아보니 앵글 선반으로 하는 게 가격 면에서 적당했다. 앵글 선반 회사도 많았다. 대개는 규격 제품을 파는데, 에이스 앵글만은 고객의 주문대로 앵글과 선반을 절단해서 보내주었다. 가로, 세로, 높이, 앵글 색상, 나무 선판 종류를 견적 포맷에 써 넣으면 정확한 단가가 나온다. 놀랍다. 내...

생명(요 1:4), 요한복음 묵상(6) [4]

  • 2013-04-25
  • 조회 수 4019

요한복음에는 ‘생명’(조에)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그 단어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익숙하다. 익숙하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니다.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모를 수 있다. 현대인들이 생명에 대해서 생각이나 하는가? 뻐한 거라고 생각하거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한다. 로고스와 생명의 관계를 아는 게 요한복음의 핵심이다. 이걸 아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목사들도 대개는 모를 것이다. 모르면서도 설교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신자들이...

6월30일- 예수가 오신 이유? (4)

  • 2006-06-30
  • 조회 수 4015

2006년 6월30일 예수가 오신 이유? (4)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막 1:38) “예수가 오신 이유?”라는 제목의 묵상은 오늘이 끝입니다. 이런 제목으로 나눌 수 있는 생각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접으려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이와 관련해서 생각할 거리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한다면 도대체 ‘어디서’ 오셨는가에 관해서 생각해봐야겠지요. 그리고 그는 도대체 어디로 다시 돌아가신 걸까요?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이 새롭게 해석되었다는 사...

6월16일- 해 질 때 [3]

  • 2006-06-16
  • 조회 수 4015

2006년 6월16일 해 질 때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막 1:32) 시몬의 장모는 이제 온전한 정신을 차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는지는 볼을 보듯 분명합니다. 이 동네 저 동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겠지요. 사람들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가 “저물어 해 질 때”라고 합니다. 야간 조명이 거의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 해가 진다는 건 낮에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접어야 할 때입니다. 낮과 밤의 경계인 바로 그 ...

하나님 나라(28)- 교회비판자들 [3]

  • 2010-06-05
  • 조회 수 4013

계몽주의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의 권위주의 구조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기독교 신앙의 심장부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비판자들이나 옹호자들은 종종 교회의 권위주의 형태를 교회의 실체로 오해한다. 참된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이외의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된다. 인간은 모든 것을 판단할 자유가 있다. 이것은 삶의 정치적 형태만이 아니라 교회 조직과 교리들에도 허용된다. 자유라는 은사와 특권은 교회의 선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교리적 결정들, 그리고 성서 문서들, 더 나가서 예수 자신의 ...

6월14일- 예수의 손

  • 2006-06-14
  • 조회 수 4006

2006년 6월14일 예수의 손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막 1:31) 복음서의 정보에 따른다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장가 든 이는 시몬 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이와 약간 다른 정보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전 9:5) 이 구절에 의하면 아내가 있는 사도들이 제법 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결혼한 상태였는지 아니면 훗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꾸리면서 결혼한 ...

6월11일- 시몬 형제의 집 [1]

  • 2006-06-11
  • 조회 수 4006

2006년 6월11일 시몬 형제의 집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막 1:29)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야고보 형제와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앞서 17,18절에서 시몬 형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를 위해서 세속적인 세계를 버리는 일종의 출가(出家)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인 진리를 선택한 사람들은 출가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종의 구도는 자신의 온 영혼을 투자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입...

일상에 대해(8) -손톱 깎기- [11]

  • 2011-01-12
  • 조회 수 4002

늦둥이 막내딸은 지금 대학교 1학년이오. 한창 세상 물정을 배울 나이요. 가능한대로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하도록 맡겨두고 있소. 학기 중에는 격주로, 방학 중에는 매주 금요일에 집에 왔다가 주일 오후에 다시 학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오. 언제부터인가 그 아이가 손톱을 기르고 있소. 손톱에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하오. 매니큐어를 바르는가 보오. 학생이 손톱 치장을 뭐하러 하니, 하고 물으면 멋있잖아요, 하고 대답하오. 그게 멋있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는데,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그냥 내버려 두고 있소. 큰 딸은 그런 일이 없...

한국교회 문제의 책임 [28]

  • 2013-08-06
  • 조회 수 3985

일전에 어떤 분과 이야기 하는 중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롭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목회자인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그분이 아주 사실적으로 말했다고 보면 된다. 내가 물었다. 생각도 깊도 신앙도 진지한 분들이 왜 수준 이하의 교회에 붙어 있는 거죠? 본인들도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그런 방식의 신앙생활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결국 자신의 영혼이 훼손되는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내가 일반 신자였다고 한다면 벌써 다른 교회로 옮겼을 겁니다. 그분의 대답은 이렇다. 신자들...

가랑이 찢기

  • 2014-01-11
  • 조회 수 3984

1월11일(토) 가랑이 찢기 오늘은 이른 아침 6시40분에 집을 나섰다가 저녁 9시20분 쯤 돌아왔다. 차를 오래 타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함께 먹고 말씀을 전하면서 지냈다.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이었다. 웬일인지 피곤하지도 않다. 다만 내일 설교가 좀 걱정이다. 오늘 일정이 오래 전에 예정되었기에 설교 준비를 미리 해놓기는 했지만 그게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다. 특히 이번 주일의 설교 본문이 좀 까다롭다. 까다롭다기보다는 너무 단순해서 설교하기가 어렵다. 예수님...

죄의식과 죄론, 4월5일(금) [13] [1]

  • 2013-04-05
  • 조회 수 3982

판넨베르크의 <인간학>(박일영 역, 분도출판사)은 일단 책두께에 겁이 난다. 깨알처럼 인쇄된 독일어 원서로는 540쪽, 번역서로는 715쪽이다. 원제는 Anthropologie이고 부제는 Anthropo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이다. 영신 대학원 학생들과 번역서로 읽고 있다. 오래 전에 한번 읽은 책인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많을 걸 배운다. 아마 이런 배움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3장의 마지막 패러그래프는 아래와 같다. 기독교 역사에서 마저 죄의식과 죄론이 양립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게 중요하다. 특히 설교자...

어지러움에 대해서 [5]

  • 2010-03-13
  • 조회 수 3982

그대는 간혹 어지럽다고 느끼는 적이 없으시오? 빈혈이 있는 사람이나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은 당연히 어지럼증을 느낄 거요. 건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심한 운동을 하고 난 후라든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몇 끼니를 굶었을 경우에 순간적으로라도 어지러움을 느낄 거요. 롤러코스터(궤도열차)를 타보셨소? 나는 그럴 기회가 없었소. 화면으로만 봐도 어지러울 것 같소. 그런데 말이오. 지금 우리가 얹혀살고 있는 지구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를 생각하면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소이다. 지구는 하루에 한번 ...

비오는 날 [6]

  • 2010-02-10
  • 조회 수 3979

비오는 날 그대, 무엇 하오? 요즘 며칠 동안 비가 오오. 늦은 겨울비요. 이제 추위가 끝났나보오. 비오는 날은 사람들을 감상적으로 만드오.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은 대개 비오는 날과 연관해서 사연이 많소. 각자 따로 우산을 갖고 나왔지만 함께 붙어서 걸을 때는 한 개로 충분하니,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애틋하겠소. 초등학교 시절도 비오는 날은 낭만적이오. 가사가 정확한지 모르겠구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우산, 파란우산, 찢어진 우산을 들고 학교에 오가던 시절이 그립고 그리...

교회에 나가는 이유(1) [1]

  • 2010-06-24
  • 조회 수 3960

그대는 왜 교회에 나가시오? 다짜고짜로 이런 질문을 받으면 기분이 좀 언짢으실지 모르겠소만 우리는 우리의 행위 전반에 대해서 늘 질문해야 한다오. 그런 질문이 어디 한두 가지겠소. 예컨대 이렇소. 그대는 왜 결혼했소? 그대는 왜 돈을 버는 거요? 그대는 왜 사는 거요? 왜 화를 내는 거요? 왜 기뻐하는 거요? 모든 것이 질문의 대상이오. 일단 우리의 관심은 교회와 신앙생활이니 여기에 한정해서 질문해 봅시다. 그대는 왜 교회에 나가시오?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오. 맞소. 우리는 예배를 드리려고 ...

하늘과 땅의 권세

  • 2017-06-16
  • 조회 수 3958

6월16일, 금 하늘과 땅의 권세 마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미팅에서 몇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 첫 말씀은 아래와 같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런 표현이 오늘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당시에는 크게 오해살만하다.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런 말을 떠벌인다. ‘하늘과 땅의 권세’는 창조주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은 사람에게 붙일 수 없다. 장군에게도 안 되고 왕에게도 안 된다. 제사장에게도 안 되고, 율법학자에게도 안 된다. 당시 사...

행복한 신앙생활 [4]

  • 2014-01-19
  • 조회 수 3958

1월19일(주일) 행복한 신앙생활 적지 않는 수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일단 부담이 크다. 성수주일과 헌금에 대한 부담은 일상적이다. 교회 안에서 모임도 너무 많다. 자기가 알아서 적당하게 하면 된다고 할지 모르나 전체 분위기가 그걸 용납하지 않으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라가야만 한다. 신자들끼리 불편하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원수처럼 싸우기도 한다. 제자교육으로 이름을 떨친 ‘사랑의 교회’마저 담임 목사 파와 반대 파가 볼썽사납게 싸우는 ...

계단 오르 내리기 file [9]

  • 2013-06-20
  • 조회 수 3946

원당리에 새로 진 집은 이층이다. 이층은 내 서재다. 거기서 책 읽고, 다비아 글 쓰고, 강의 준비도 하고, 기독교 잡지에 연재할 원고도 쓰고, 주보 초안 짜고, 설교 준비하고, 유튜브 음악도 듣는다. 내 모든 삶의 공간이다. 그리고 잠도 잔다. 하루에도 아래층으로 난 계단을 수없이 오르 내린다. 몇 번인지 카운트 해보지 않았지만 대략 스무번은 되지 않을까 한다. 아래 사진은 오르는 계단이다. 전체가 열여덟 계단이다. 아직 서재가 다 정리되지 않아서 책들이 계단에 쌓여 있다. 언제 다 정리될는지... 올라갈 때는 편하지만 내려...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