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는 ‘생명’(조에)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그 단어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익숙하다. 익숙하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니다.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모를 수 있다. 현대인들이 생명에 대해서 생각이나 하는가? 뻐한 거라고 생각하거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한다. 로고스와 생명의 관계를 아는 게 요한복음의 핵심이다. 이걸 아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목사들도 대개는 모를 것이다. 모르면서도 설교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신자들이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니 목사들은 마음 편하게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쉽게 목회를 할 수 있다. 사람들만 잘 다루면 목회는 그냥 굴러간다. 그게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로고스는 예수다.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말은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게 무슨 뜻인가? 예수 밖에는 생명이 없었다는 말인가? 도대체 그 생명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의 공부가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는지가 명백해졌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부다. 선입관을 버리고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생명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이는 없겠지요?
하지만, 실상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오늘의 문제인 것이지요.
서울을 떠나 온지 한 달을 넘기고 있답니다.
이제부터 군 부대 사역을 해야 할 터인데...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를 합니다.
교회가 그냥 잘 굴러가는데 만족할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잠자는 회색 늑대'님 말씀처럼 바리새인의 모습이 자칫 나타날까 두렵기도 하고요.
늘 겸손히 그리고 잠잠히 성령의 힘에 의지할 뿐이랍니다.^^
28일 주일에는 원당에 아름다운 축제의 장이 되겠네요.
평일에도 한 번 기회를 만들어 보심이....^*^ ㅎㅎ
그렇죠. '그냥' 굴러가는거죠.
벼랑끝인지 가시밭인지 어디로 굴러가는지는 모르고 굴러가겠죠.
많은 신자들이 생명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살아가다가
정말 더 큰일이 날까 인간적인 마음으로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된장국 한술 뜨고 뱃속이 뜨뜻해지듯이, 우리의 마음이 말씀한 술에 뜨뜻해져야 하는데 어찌나 간사한지...
예수가 생명을 구할때 먼발치에서 구경하며 어떻게 저것을 죽일까 궁리하는 할일 없는 바리새인마냥
나도 모르게 서슬퍼런 눈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을때도 있습니다.
자유로울 수 없네요.
애써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