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묵상(4)

조회 수 1320 추천 수 0 2015.02.21 19:07:42

4) 221()

 

<본문읽기>

25:1-10

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9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32:1-11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6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8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9:2-13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집중 묵상 구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묵상>

위 구절은 유명한 경구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물론 병든 사람이지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전후맥락을 빼놓고 읽으면 뻔한 말씀처럼 들린다. 이 경구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가운데서 나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곳은 어촌인 가버나움으로 추정된다. 세관이 있다고 하니 경제 활동도 활성화되었고, 이동 인구도 제법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세관 업무를 보고 있던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다. 제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처음 본 사람을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마태가 예수님을 몇 번 찾아갔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른 제자가 마태를 예수님에게 소개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 갔고, 마태는 먹을거리를 대접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그 자리에 함께 한 것 같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9:10)

 

작은 축제와 같은 정경이 떠오른다. 거기 모인 이들은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이다. 죄인들이 누군지 정확하게 거론되지 않았다. 당시 유대 전통에 따르면 이방인들은 모두 죄인들이다. 살인 강도범이나 파렴치범들도 물론 죄인이고,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이나 귀신 들린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요즘 말로 하면 그들은 마이너리티다.

마침 그곳에 바리새인들도 있었다. 그들도 모임의 일원이었는지, 아니면 모임 소식을 듣고 감시하러 잠시 들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은 제자들에게 예수가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런 일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의사 운운하신 것이다. 병든 자로 사는 게 좋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면 곤란하다. 세리로 사는 게 좋다는 뜻도 아니다.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판단의 기준으로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범적인 사람들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그들은 모범적인 사람들이다. 경건했고 성실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중추라 할 율법 실천에 매진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았다. 남에게 보일만한 업적이 많았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 업적 의()라고 한다. 이런 삶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남에게 본이 되는 삶은 필요하다. 문제는 거기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을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본이 될 만한 업적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게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구원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는지.

예수님의 생각과 논리가 말이 될까? 억지는 아닐까? 자기 합리화는 아닐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그 말씀에 이은 13절을 읽어야 한다. 거기서 호 6:6절을 인용하셨다. ‘나는 긍휼을 원하지 제사를 원하는 게 아니다.’ 긍휼을 공동번역은 자선으로, 새번역은 자비로 번역했다. 루터는 Barmherzigkeit로 번역했다. 이 독일어 단어는 자비, 연민 등을 가리킨다. 어떤 단어로 번역되었든지 핵심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또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가리킨다. 역지사지, 또는 측은지심일 수도 있다. 여기서 긍휼이 제사와 대비되었다.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긍휼은 사람을 향한 것이다. 예수님이 제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제사에만 마음을 두고 사람에 대한 연민이 없는 경우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은 연민이 없고 세리와 죄인들은 연민이 많을까? 이것도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바리새인이라고 모두 율법주의자는 아니며, 세리와 죄인이라고 해서 모든 휴머니즘이 넘치고 연민이 넘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만 본다면 그걸 개연성이 높다. 과부의 마음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야말로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더 깊이, 더 연민을 갖고 아시는 분이다. 그게 긍휼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사람들과 똑같은 고난을 짊어지게 한 것도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이다. 우리가 그분의 긍휼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지, 그런 마음이라도 먹고 있는지.

 

<기도>

주님,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긍휼에 힘입어 우리도 긍휼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이게 우리에게 가능한 일인지 확신할 수 없으나, 그렇기 때문이라도 하나님의 긍휼에 더 깊이 들어가기 원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3629 사순절 묵상(17) [6] 2015-03-09 1287
3628 사순절 묵상(16) 2015-03-07 1117
3627 사순절 묵상(15) [6] 2015-03-06 1186
3626 사순절 묵상(14) 2015-03-05 1085
3625 사순절 묵상(13) [5] 2015-03-04 1340
3624 사순절 묵상(12) 2015-03-03 1416
3623 사순절 묵상(11) 2015-03-02 1496
3622 사순절 묵상(10) [2] 2015-02-28 1676
3621 사순절 묵상(9) 2015-02-27 1248
3620 사순절 묵상(8) [2] 2015-02-26 1388
3619 사순절 묵상(7) [2] 2015-02-25 1334
3618 사순절 묵상(6) 2015-02-24 1191
3617 사순절 묵상(5) [4] 2015-02-23 1410
3616 원당일기(64)- 토지읽기(11) [4] 2015-02-22 1399
» 사순절 묵상(4) 2015-02-21 1320
3614 사순절 묵상(3) 2015-02-20 1393
3613 사순절 묵상(2) [2] 2015-02-19 1572
3612 사순절 묵상(1) [4] 2015-02-19 2994
3611 원당일기(63)- 구정 연휴 전야 [2] 2015-02-17 1385
3610 원당일기(62)- 늦겨울 비 2015-02-16 1439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