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당일기(43)- 나는 만진다.

조회 수 1523 추천 수 0 2015.01.24 22:46:26

 

나는 만진다.

 

오늘 아침에 나는 식당 창문의 커튼을 달았다. 2년 전 이사 올 때 달았던 커튼이 얼마 전에 고리 채 몽땅 떨어졌었다. 이제 좀 튼튼하게 달려고 슈퍼에 가서 커튼용 봉을 사온 게 있어서 그걸 달았다. 그 작업이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다. 봉을 장착하려면 걸이를 먼저 나사로 고정시켜야 한다. 천정이 석고보드로 되어 있어서 자칫하면 나사가 헛돌아간다. 어쨌든지 오늘 나는 커튼을 깔끔하게 달았다.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거다. 이 작업을 하면서 여러 물건을 손으로 만졌다. , 봉 걸이, 나사, 드라이버, 받침대 의자, 커튼, 커튼 철사 고리 등이다. 각각의 모양도 다르고 감촉도 다르다. 뭔가를 만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비롭다. 시각장애인의 촉감은 절대 따라갈 수 없지만 그래도 손의 촉감에 집중하면 그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지금도 컴퓨터 자판 위에 내 손가락이 춤을 추고 있다. 자판을 손끝으로 느끼지 않으면 이건 안 되는 작업이다. 책상 위에 책도 있다. 책의 느낌은 좀더 독특하다. 종이의 질감은 자판의 질감과는 다르다. 질감만이 아니라 손으로 물건의 입체를 느낄 수 있다. 눈을 감고 손으로만 컵을 만져보면 더 좋다. 연필도 마찬가지다. 수건, , 걸레, 사과는 각자 자신들의 세계를 확보하고 있다. 손으로 만지고, 가끔은 가슴에 안으면서 나는 세상에 마술 쇼가 펼쳐지는 듯한 환상에 빠지곤 한다.

 

나는 매월 한 차례 씩 교회에서 성찬예식을 집례 한다. 빵을 손으로 잡는다. 손에 빵의 느낌이 전달된다. 포도주는 직접 손으로 잡을 수 없다. 대신 포도주가 담긴 넓적한 토기 그릇을 손으로 받쳐 든다. 그 느낌을 회중들에게 짤막하게나마 전하다. 빵과 포도주와 토기그릇을 우리가 손으로, 또는 눈으로, 또는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사건이다. 하이데거 방식으로 말하면 거기에 바로 사중자(Gevierte), 즉 하늘과 땅과 거룩한 것과 죽을 자들이 만난다.

 

어릴 때는 누구나 흙장난을 많이 한다. 모래를 만지면서 얼마나 즐거웠는가. 거기에 두꺼비 집을 지어놓고 노래를 불렀다.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나는 손으로 무엇을 만질 수 없는 순간이 곧 오리라는 걸 안다. 그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시나브로 촉감 자체가 둔해질 것이다. 아직은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나는 사물을 만질 것이다. 황홀하게! 나는 만진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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