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당일기(54)- 토지읽기(9)

조회 수 1446 추천 수 0 2015.02.06 23:15:40

 

토지 읽기(9)

 

<토지>의 주인공이라 할 서희 이야기는 앞부분에 많이 나오고, 중반으로 넘어가면서는 크게 줄어든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서희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건 분명하다. 박경리가 서희를 묘사할 때가 모델이 있었을지가 궁금하다. 아주 독특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어릴 때부터 악착같았던 서희는 한민족의 운명과 비슷한 운명을 살았다. 그에게 조준구는 일본 제국이 아니겠는가. 서희는 감정을 속으로 삭이는 사람이다. 그가 우는 걸 본 사람은 거의 없다. 남편에게도, 자식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에게도 다른 이들과 똑같은 감정이 있었다. 다만 그걸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남자와의 관계도 그렇다. 남편 길상과는 별로 애틋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인이었다가 남편이 된 길상에 대한 아내로서의 자세는 반듯했다. 그리고 정신적로 남편을 존경하고 의지하기도 했다. 간도 용정에서 큰 재산을 이루고, 조준구에게 빼앗겼던 땅도 다 찾아 고향에 돌아온 서희는 흔들리지 않고 아들 둘을 키운다. 그리고 하녀였다가 나중에 기생이 된, 길상을 좋아했지만 서희와 길상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 챈 뒤로 다른 길을 갔던 기화가 낳은 여자 아이를 딸처럼 키웠다. 서희에게는 단골 의원이 있었다. 그곳 의사인 박 아무개는 서희를 좋아했다. 그의 아내는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고 한다. 몇 번 자신의 마음을 서희에게 표현하기도 했다. 서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냉정하게 모든 관계를 끊어내지도 않고 어정쩡하게 지냈다. 박 의사는 결국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다른 여자와 재혼했고,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하게 되면서 자살했다. 그 소식을 서희는 길상이 탱화를 그리고 있는 절로 가는 도중에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는다.

 

서희는 전신이 떨려움을 느낀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도 충격이 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최씨 집안의 오랜 주치의였던 박의사의 갑작스런 죽음, 그것도 자살이라니, 충격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실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서희는 돌팔매가 심장 한가운데에 날아든 것 같았다. 그것은 박의사의 죽음에 자신이 관련되어 있다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안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서희의 충격이 상상 밖이어서 당황했고 뭐라 더 이상 말하는 것이 무서웠다. 안자는 어느 정도 박의사와 서희의 내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의사는 서희에 대한 감정을 가슴에 묻어둔 채 간 것은 아니었다. 항간에 소문이 나돌 만큼 그는 서희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특히 본인인 최서희에게는. 그런데도 서희는 박의사를 회피하지 않았다. 쏟아놓은 감정을 마치 박의사 가슴에다 주워담아 주듯이, 그것은 서희의 일관된 태도였다. 거의 당황하는 일 없이, 주저하는 일도 없이, 박의사가 서희를 단념하기 위하여 최후의 수단으로 결혼을 한 것은 서희를 눈앞에 두고 이루지 못할 사랑을 번민한 불행보다 더 큰 불행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결혼과 가정, 그것은 결혼이 아니었다. 가정도 아니었다. 전투장이었고 살벌 벌판이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의 것까지 내버려야 했던 일종의 지옥이었다. 물론 여자가 나빴고 저속했으며 아귀와도 같이 물질을 탐했지만 박의사는 그것을 방치했다. 애당초 골라서 잡은 여자가 아니었고 그는 다만 형식만을 통과하자는 무책임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박의사의 자살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서희가 심장에 돌팔매가 날아든 듯 느낀 것은 박의사의 죽음에는 자신의 무게가 실려 있다는 자각 때문이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때 자신으로 인하여 박의사가 불행했고 불행한 결혼을 했으며 자살을 택할 밖에 없었다는 것에 대한 가책보다, 그 가책을 진부한 것으로 밀어붙여 놓고 그에게 엄습해온 것은 왜 자신은 박의사를 회피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어째서 쏟아놓은 감정을 그의 가슴에 주워 담아 주듯 그런 태도로 일관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최소한 친구로서 그를 잃지 않으려 했던가. 길상이 만주에 있는 동안 또 감옥에 있는 동안 박의사의 지극한 사랑이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아니었던가. 아니 그런 것 이상의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서희는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다. 안자는 또다시 당황하고 놀란다. 서희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얘기가 나오고 분위기가 이상하여 그랬던지 윤씨도 말없이 운전만 한다. 가로수가 얼마만큼이나 지나갔을까. 하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6327-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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