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101
6: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얼굴이 사람’(계 4:7) 같은 셋째 생물이 다시 요한을 부릅니다. 얼굴은 사람 같으나 나머지 부분은 동물 같겠지요. 요한이 더는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묘사할 수도 없는 저 생물은 우리의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 세상에서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그러니까 밖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돈, 집, 나무, 고양이, 민들레 등등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것은 오히려 구체화할 수 없습니다. 손에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감각적인 대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거부합니다. 출 21:1절 이하에 십계명이 나옵니다. 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 ” 유대교의 회당이나 이슬람교의 모스크에는 신을 가리키는 상징물이 없습니다. 반면에 로마가톨릭교회의 성당에는 예수 십자고상이 있고, 개신교회 교회당에는 십자가상이 있습니다. 십자가상을 보면서 예배를 드리니까 개신교회 교인들이 자칫 하나님을 그 십자가에 한정해서 표상할까 염려되기는 합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회가 위에서 인용한 출 21:4절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개신교 교단에서는 십자가상을 강단 벽에서 제거하기도 합니다.
요한은 검은 말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백마, 두 번째는 적토마, 세 번째는 흑마입니다. 당시에 흑마를 키우는 민족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용맹스러워 보이기는 하나 왠지 불길한 느낌도 듭니다. 흑마를 탄 자의 손에 저울이 들렸습니다. 저울은 곡식의 무게를 잴 때 사용합니다. 저울을 바르게 사용해야만 공정한 상거래가 가능합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저울은 인류에게 닥칠 끔찍한 재앙을 암시합니다.
공동번역 [6:5 어린 양이 셋째 봉인을 떼셨을 때에 나는 셋째 생물이 "나오너라."하고 외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검은 말 한 필이 있고 그 위에 탄 사람은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새번역 [6:5 그 어린 양이 셋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셋째 생물이 "오너라!"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니, 검은 말 한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세상사에 공정한 저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편협과 편견이 없이 중용의 덕을 지키며 살아가는 정의로운 공정한 세상 말입니다.
어제가 4.3제주항쟁 기념일 이었습니다.
근대 한국사에서 아픔이고 슬픈 날이며 반성해야 합니다.
이 날은 정의와 공정, 평화의 잣대로 삼아야 합니다.
저울이 한 곳으로 기울어져, 또다시 제주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 주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공정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저울 앞에 당당할 수는 없지만, 반성과 성찰만은 반드시 해야 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