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목사공부(63)

  • 2014-06-20
  • 조회 수 1394

다음과 같은 설문을 돌렸다고 할 때 어떤 대답이 나올지를 예상해보라. ‘기독교인의 경제 윤리관과 세상 사람들의 경제 윤리관을 비교할 때 다음의 세 경우 중에서 어느 경우가 옳다고 보십니까? 1) 기독교인이 더 낫다. 2) 세상 사람들이 더 낫다. 3) 양쪽 모두 똑같다.’ 대답은 십중팔구 3번이다. 기독교인의 경제 윤리관이 세상 사람들보다 나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고, 비슷하다. 이런 문제에 관한한 신자들에게 너무 기대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크게 실망할 것도 없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대개 거기서 거기다...

목사공부(62)

  • 2014-06-19
  • 조회 수 1481

오늘 한국교회의 헌금제도가 성령의 일인지 악령의 일인지를 내가 독단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기준은 제시할 수 있다. 헌금제도가 상품 원리로 작동되는지를 보면 된다. 상품 원리는 상품의 내용이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의 이해타산에 따른 거래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시장 메커니즘을 가리킨다. 물론 상품의 내용이 좋아야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양쪽의 이해타산만 맞으면 거래는 성립된다. 상품의 질이 떨어져도 고객의 구입 심리만 자극할 수 있으면 거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헌금의 심리기제에 ...

목사공부(61) [2]

  • 2014-06-18
  • 조회 수 1807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은 복음서 네 곳에(마 21:12-17, 막 11:15-18, 눅 19:45-48, 요 2:13-22) 다 나온다. 복음서 기자들이 그 사건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당시 제사장들은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성전 마당에서 운용하고 있었다. 합법적인 일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걸 문제로 여기 않았을 것이며, 비판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관행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예수님은 거기에 극렬 저항하셨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환전상과 비둘기 장사꾼들의 시설물을 뒤엎었다. 노점상들...

목사공부(60) [4]

  • 2014-06-17
  • 조회 수 1867

한국교회 실정을 감안하면 헌금의 신학적 근거만으로 신자들이 헌금 행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게 어려운 일이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헌금 행위는 강제에 의해서만 작동된다. 겉으로는 거룩한 포즈를 취하지만 속으로는 노예 심리다. 헌금이 강제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간단히 언급되었지만, 여기서 다시 두 가지로 다시 정리하겠다. 하나는 영성의 차원이다. (십일조)헌금을 하면 수십 배의 보상을 받으며, 거꾸로 헌금을 하지 않으면 물질이나 건강의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신자들의 영혼을 채...

목사공부(59) [2]

  • 2014-06-16
  • 조회 수 1901

앞에서 헌금의 당위를 두 가지로 짚었다. 하나는 교회 공동체의 재정 활동에 실존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배금주의에 대한 저항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짚자. 이것은 좀더 원초적인 영성에 속한 것이다 헌금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다. 수단은 돈이지만 본질은 자기 자신이다. 구약의 제사 행위가 그 뿌리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러 가지의 제사를 드렸다. 그럴 때마다 제물도 바쳐진다. 경우에 따라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또는 곡식을 바친다. 동물을 잡아...

목사공부(58)

  • 2014-06-14
  • 조회 수 1539

헌금 행위에는 교회의 살림살이에 실존적으로 참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신구약성서가 줄기차게 외치고 있는 물신주의에 대한 항거가 그것이다. 모세오경을 비롯해서 선지자들의 예언은 가나안 원주민의 신앙인 바알숭배와의 투쟁에 초점이 맞춰있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었다. 바알을 섬긴다는 것은 풍요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곧 물신주의다. 실제로 가나안 사람들은 광야 40년 생활을 통해서 생존에 급급해하던 이스라엘이 볼 때 화려한 문명을 구가했다. 이스라엘 사람들...

목사공부(57)

  • 2014-06-13
  • 조회 수 1459

신앙의 진정성은 기독교 신앙에 실존적으로 참여할 때 확보된다. 이는 기독교 신앙에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는 뜻이다. 바르트에 의하면(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 63쪽) “원하든 않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에게 매혹당할 뿐만 아니라 휩쓸린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신학의 세계에 들어갔다고 볼 수 없다. 휩쓸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영적인 세계에 실존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단순히 신앙적인 열정이라고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구경꾼이면서도 겉...

목사공부(56)

  • 2014-06-12
  • 조회 수 1418

헌금에 참여하지 않는 신자들의 경우를 위에서 두 가지로 설명했다. 이런 경우는 이해가 간다. 각자 형편과 생각에 따라서 스스로 결정할 일이니 내가 더 이상 왈가왈부 할 게 없다. 제 삼의 경우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뭔가 말을 해야겠다. 헌금 행위 자체를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이것이다. 헌금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거나, 헌금은 기복주의에 떨어진 사람들의 유아적 행태라거나, 목회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선동에 이용당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율법적인 차원에서 과도할 정도로 헌금...

목사공부(55) [4]

  • 2014-06-11
  • 조회 수 1799

어떤 이들은 나름 합리적인 이유로 헌금을 거부하거나 헌금 행위에 소극적이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내는 헌금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 밖의 구호단체에 내는 기부금도 헌금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도 과부나 고아, 또는 긴급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구호금을 지원하는 장치가 있었으며, 바울도 흉년 등의 문제로 극심한 어려움에 처했던 예루살렘 교우들을 돕기 위해서 광범위하게 기금을 모금했다. 유럽이나 북미에는 일상적인 기부 문화가 발달해 있다고 한다. 오늘 기독교인들도 ...

목사공부(54)

  • 2014-06-10
  • 조회 수 1428

헌금을 내지 않는, 혹은 못 내는 사람들도 입장은 서로 다르다. 일단은 절대 빈곤층에 속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단돈 몇 만원, 몇 천원이 아쉬운 형편이라 헌금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헌금을 내지 않는 게 좋다. 가난도 상대적이기 때문에 헌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기준을 정하기는 어렵지만 세금이 면제되는 액수를 그 기준으로 잡아도 괜찮을 듯하다. 빈곤층이라고 하더라도 소액일망정 자발적으로 헌금에 참여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다. 어쨌든지 경제 형편이 어려운 이들로 하여금 헌금 문제로 인해서 신앙생...

목사공부(53)

  • 2014-06-09
  • 조회 수 1890

앞에서 헌금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언급했는데, 그것보다는 헌금행위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돈이 삶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에서 헌금행위에 기꺼이 참여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다 인정하다시피 현대인들은 늘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산다. 노후를 위해서 충분하게 저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재테크가 대화의 중심 주제이기도 한다. 일정한 금액을 헌금으로 낸다는 것은 제 정신으로는 좀 힘든 일이다. 많은 교회가 헌금을 율법의 차원으로 접근하는 ...

목사공부(52)

  • 2014-06-07
  • 조회 수 1653

앞에서 절기헌금을 당장 폐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십일조 헌금은 그것보다 더 어렵다. 한국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토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제도에 위기가 오면 한국교회 자체에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 한국교회가 십일조에 거의 목을 매는 방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시시비비 논란은 많아도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못하는 것처럼, 십일조 문제는 반복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만다. 나는 일반 신자로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십일조에 대한 그들의 본심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일반 신자...

목사공부(51) [2]

  • 2014-06-06
  • 조회 수 1897

십일조 절기헌금이나 특별집회 헌금보다 더 풀기 어려운 제도는 십일조 헌금이다. 교회 재정의 상당 부분이 십일조로 채워진다. 교회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최소한 70% 이상을 차지할 것이다. 십일조 제도는 오랜 세월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여기에는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없다. 교회 개혁을 표방하는 교회나 단체도 십일조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문제가 있더라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좀 말이 되지 않는다. ...

목사공부(50)

  • 2014-06-05
  • 조회 수 1559

절기헌금보다 더 문제가 많은 헌금행태도 여럿이다. 앞에서 언급한 일천번제만이 아니다. 여러 종류의 집회 때 신자들은 거의 의무적으로 헌금을 봉투에 넣어서 바친다. 강사는 봉투에 적힌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축복 기도를 한다. 믿기 힘든 경우지만, 어떤 강사들은 일정액의 강사료를 받는 게 아니라 헌금 총액을 일정한 비율로 나눠서 받는다고 한다. 강사들이 헌금을 강요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소위 유명한 부흥회 강사들에게서 자주 벌어지는 것인데, 신자들이 강사 목사에게 안수 받으려면 일종의 촌지 형태인 헌...

목사공부(49)

  • 2014-06-04
  • 조회 수 1622

일반적으로 우리는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수 없으며, 하나님은 그런 헌금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헌금(돈)을 주고받는 식으로 성립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하나님은 사물로 존재하는 이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존재하신다. 초월적인 존재다. 그런 하나님께 가장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헌금(돈)을 바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소나 양을...

목사공부(48)

  • 2014-06-03
  • 조회 수 1466

헌금 사도신경(또는 니케아신조)을 통한 신앙고백 다음에 우리는 헌금을 드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배당에 들어올 때 헌금함에 넣은 헌금을 바구니에 담아 대표자가 앞으로 들고 나와 아래 강단에 올려놓는다. 이때 모두 일어나서 헌금 찬송을 부른다. 헌금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한 목사의 정체성은 헌금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천민자본주의 성격을 보이는 대한민국의 경제윤리가 한국교회의 헌금 제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교회 구조와 운용이 헌금을 중심으로 움...

목사공부(47)

  • 2014-06-02
  • 조회 수 1509

사도신경은 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이라는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여러 교파들이 각각의 특색을 유지하면서도 사도신경을 예배의 한 순서로 받아들이면 이를 통해서 교회 일치가 보존될 수 있다. 물론 사도신경만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도 교회 일치에서 중요하긴 하다. 찬송가를 같은 걸로 사용한다거나 성경을 동일한 번역으로 사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 외에도 강단을 교류하거나 대사회에 관계된 일을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사도신경만큼 중요한 건 아니다. 사도신경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가장 압축적으로 ...

목사공부(46) [4]

  • 2014-05-31
  • 조회 수 2099

예배의 한 순서로 사도신경(또는 니케아 신조)을 통한 신앙고백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조라는 사실에 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신조가 나왔지만 사도신경(또는 니케아 신조) 정도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는 신조는 없다. 앞에서 한번 짚었듯이 어떤 이들은 신경, 또는 신조가 성경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이유로 낮춰보려고 한다. 그건 오해다. 신조와 성경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복음서와 서신에는 원시적 신조들이 많이 나온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

목사공부(45) [2]

  • 2014-05-30
  • 조회 수 1752

침례교회가 제도로서의 교회를 배척한다는 것은 곧 교회의 역사를 배척한다는 뜻이다. 교회의 역사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의 의미를 낮춰보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의 역사가 약화되면 교회 역사를 통해서 생산된 신학문서들도 그 비중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신학문서의 가장 윗자리에 사도신경이 자리한다. 따지고 보면 침례교회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신학과 신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런 신앙적 특징을 보이는 이들은 교회 제도와 신학보다는 개별 신자들의 신앙적인 각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

목사공부(44) [1]

  • 2014-05-29
  • 조회 수 1789

니케아신조는커녕 사도신경마저 예배 순서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파가 있다. 대표적으로 침례교회다. 모든 침례교회가 받아들이지 않는 건 아니다. 개중에 받아들이는 교회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는 게 옳다. 그들의 입장에도 일리는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두 가지만 말하겠다. 첫째, 사도신경은 신약성서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는 게 아니다. 둘째, 사도신경은 로마교회의 전통이다. 로마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오는 개신교회는 사도신경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들의 이런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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