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셸(10)

조회 수 2225 추천 수 0 2014.03.04 23:20:17

 

우리가 발설한 말, 맹세나 서약이나 약속은 우리에게 의무감을 느끼게 한다. 서약을 하면서, 혹은 명예로운 말을 하면서, 맹세를 하면서, 말로 동의를 하면서, 사람은 말이 의지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며, 말은 그 말을 한 사람과는 별도로 그와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발설한 말은 그 자체로 존재함으로써 그 말을 한 사람에게는 실체가 된다. 그 말의 의미에 관해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해도 그는 그 말의 힘에 생생하게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객관성 가운데 말은 기도하는 사람 앞에 있다. 기도의 말은 서약을 하는 것과 같다. (88)

 

위의 진술은 언어 존재론에 근거해서 기도를 설명한 것이다. 기도도 기본적으로 언어에 의한 것이니까 언어의 본질을 알아야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다. 헤셸을 비롯해서 많은 학자들이 언어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 언어 도구주의를 넘어서는 관점이다. 보통 우리는 언어를 의사소통 수단 정도로 여긴다. 이럴 때 언어는 칼을 사용하듯이 일종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그러나 언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면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는 근원적인 능력이다. 성서는 성서기자들에게 종속되지 않고 고유한 길을 가면서 능력을 보인다. 기도 또한 그렇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 언어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배당한다고 보는 게 옳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은 일단 좋은 기도를 배워야 한다. 기도 언어의 능력에 참여해야 한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검증된 기도문은 많다. 그런 훈련이 된 사람이 일정한 수준에 오르면 창조적인 기도 언어의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레벨:4]파란하늘지붕

2014.03.06 10:18:36

언어의 존재론적 차원이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마치 시크릿의 한 부분처럼 오해 될것 같기도 합니다^^ 언어말고 몸짓이나 눈짓은 어떤가요? 그것도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가능한 대상일까요? '신학공부'강의는 잘 들었습니다. 첨 뵙는 자리였는데, 담담하고 느리게, 하지만 위트있는 강의였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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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4.03.06 16:41:11

예, 이번 강의 자리에 오셨군요.

시크릿이 무엇인지 몰라 그것과 연결하기는 힘드나

언어의 존재론적 차원을 약간 보충할 수는 있습니다.

언어가 어떤 형태나 사물이나 현상보다 먼저 있었다는 뜻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요한복음의 진술이나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는 말씀으로

세상에 빛이 생기고... 등등의 창세기 진술이 그걸 가리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 또는 개념을 생각해보세요.

그게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건 3-4세기이지만

원래는 근원적으로 존재했던 언어입니다.

그 삼위일체라는 말이 있었기에

기독교 역사에 그 개념이 나타날 수 있었던 거지요.

몸짓과 눈짓은 존재론적 차원을 보이지 못합니다.

언어로부터 나오는 몸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레벨:4]파란하늘지붕

2014.03.06 21:40:35

늘 성실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알듯하기도 하고 모를듯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원리로 사용하셨던 '말씀'이라는 개념이 인간이 기도할때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과 비교될수 있는것인가요? 정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말을 하셔서 그것이 물체나 개념들이 음성인식처럼 탄생이 된다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것처럼 언어는 무언가의 개념이나 형이상학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한 수사로 그 이후에 사용되는것은 아닙니까? 그 언어가 먼저 존재하고 앞선다는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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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4.03.06 23:36:00

물론 하나님께 성대가 있어서 사람처럼 말하는 건 아니지요.

바르트 식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원초적 언어로서

그분의 행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로고스(말씀)가 바로 그것이구요.

언어 존재론적 근거를 증명하기는 내 능력 밖입니다.

이건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이며, 느낌이며, 이해에 속하는 거겠지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는 거와 비슷합니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린다면 이렇습니다.

에릭 프롬의 책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존재의 차원을 깨달은 다음에

실제 삶에서 존재지향적 차원이 열렸습니다. ㅎㅎ

존재라는 언어가 내 삶보다 먼저 있었던 거지요.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나와 모든 사람들과 상관없이

그것의 길을 가고 있겠지요.

더 깊은 곳을 뚫어볼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그때 그렇게 자기를 드러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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