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목사공부(2) [2]

  • 2014-04-13
  • 조회 수 2609

신학생과 목사의 과잉 배출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긴 하다. 남북통일 이후 북한 지역에 달려갈 목사들을 준비시키려면 목사 배출을 좀 넘치게 해도 좋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런 말은 전형적인 견강부회다. 그런 자기 합리화로 오늘의 목사 과잉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큰 섭리는 그분께 맡기고 지금 여기서 시시비비를 가릴 건 가려야 한다. 고칠 게 있으며 고치고, 버릴 게 있으며 버리고, 필요한 건 채워야 한다. 목사 과잉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 중의 하나는 목사들끼리의 경쟁이다. 경쟁이 교회 성장의 ...

목사공부(1) [1]

  • 2014-04-12
  • 조회 수 2383

한국에는 목사가 넘쳐난다. 목사가 활동할 수 있는 자리는 제한적이다. 목사가 됐지만 자리가 없어서 백수로 있거나 대리 운전이나 택배 기사 등, 임시로 다른 일을 하는 이들도 제법 많다. 담임 목사 자리를 구한다는 공채 광고에 사오십 명은 보통이고, 많게는 칠팔십 명이 지원한다. 요즘 젊은이들의 어려운 취업 상황과 비슷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일차 원인이다. 2천 년대에 들어오면서 교인 숫자는 정체 되거나 줄어드는데 비해서 80, 90년대 늘어난 신학생 정원 숫자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수요가 줄면 ...

<목사공부>를 시작하며... [4]

  • 2014-04-11
  • 조회 수 2657

<목사공부> 묵상을 시작하며... 매일 묵상 코너를 앞으로 당분간 <목사공부> 제목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면 그걸 책으로 묶어낼 생각입니다. 신학대학교 커리큘럼 중에는 목회학, 또는 목사학이 개설된 학교도 있습니다. 똑같은 제목은 아니라 하더라도 목사 훈련을 위한 과목은 대다수 신학교에 다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런 교과서적인 내용을 다시 정리하려는 게 아닙니다. ‘목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허심탄회하게 제기하고 나름으로 대답을 찾아볼까 합니다. 다비아의 기본 방향인 인문학적 관...

헤셸(42) [2]

  • 2014-04-10
  • 조회 수 1937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주를 지으신 것은 우리의 탐욕, 시기심과 야심을 충족시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살아남은 것은 우리가 저속한 허영심으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수백만 명이 순교당한 것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을 우리가 성취하도록 우리 자신을 성별할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토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 다가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산을 들어 올려 그 백성들의 머리 위에 들고 계시면서 “너희가 토라를 받아들이든가 ...

헤셸(41)

  • 2014-04-09
  • 조회 수 1432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실없는 말을 지껄여 왔다. 우리는 이상적인 것들을 허망한 것으로 간주해왔다. 우리가 주님을 불러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지만 우리는 그분을 무시했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 설교했지만 그분을 피했다. 우리는 그분을 찬양했지만 그분을 깔보았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실패한 것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분의 목소리는 광야에서 울부짖으셨다. 얼마나 능숙하게 그분의 목소리는 성전 안에 갇혔으며 유폐되었던가! 얼마나 자주 그분의 목소리는 다른 시끄러운 소리에 가려졌으며 왜곡되었던가! ...

헤셸(40) [3]

  • 2014-04-08
  • 조회 수 1706

예식주의는 큰 문제, 즉 오늘날 지배적인 종교 사상이 된 상징주의라는 큰 문제의 한 부분이다. 현대인은 더 이상 실재를 얼굴을 맞대고 직면하는 방법을 모른다. 현대인에게 실재의 세계는 오직 그라프와 도표, 도구와 기호를 통해서만 알려진다. (214쪽) ‘현대인은 더 이상 실재를 직면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헤셸의 진술을 이해하려면 우선 실재(reality)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대학, 직장, 결혼, 재산 등은 다 실재가 아니다. 그런 것은 다 지나간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지도 못한다. 연봉...

헤셸(39)

  • 2014-04-07
  • 조회 수 1448

우리가 성서를 문학으로 환원시키지 않도록, 유대인들의 율법 준수를 좋은 태도로, 탈무드를 예의범절 책으로 환원시키지 않도록 경계하자. (212쪽) 오늘의 유대교도 우리와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헤셸은 세 가지를 말했다. 성서를 문학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문제가 하나다. 성서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종교적 경건을 배우는 것이 바로 성서의 문학화다. 그들의 율법은 우리에게 교회생활과 비슷하다. 단순히 기독교인다운 모습을 만들어가는 게 신앙인 것처럼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뜻이다. 탈...

헤셸(38) [4]

  • 2014-04-05
  • 조회 수 1780

예배와 삶은 서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유대교는 삶의 영역에서 간헐적인 특별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찬란하게 고립된 신전들이나 혹은 특별한 날에 벌어지는 절기의 축제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회당은 은둔이 아니며, 또한 결정적인 것은 구별된 날들에 예전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절기들이 어떻게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영적인 삶의 최고봉은 반드시 드물게 찾아오는 황홀경의 순간들에서만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최고봉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간에 도달할 수 있으며 또한 일상적인 행위 ...

헤셸(37)

  • 2014-04-04
  • 조회 수 1401

윤리학의 위기는 그 뿌리가 형식주의에 있으며, 선의 본질이 선한 의도에 있다는 견해에 있다. 현대인은 선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면서 절망했다. 선한 의도라는 이름으로 악이 창궐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교리가 본질적인 이단이다. 유대교의 운명은 인간 행위의 절대적인 연관성이라는 사실과 함께 한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께도 행위가 기인하는 것으로 돌린다.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은 행위 안에 있다. 행위는 거룩함의 원천이다. (206쪽) 위 글은 앞의 글을 읽어야 좀더 생생하게 이해될 수 있다. 헤셸...

헤셸(36) [2]

  • 2014-04-03
  • 조회 수 1787

영은 우리가 성취한 것, 우리의 목표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 우리가 가는 길 위에도 있다. 이 때문에 매일 혹은 안식일에 예배당에 가는 행동 자체가 말씀 없는 노래이다. 단순한 가슴으로 겸손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마치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아이가 어머니 앞에 그 악보를 펼치는 것과 같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을 펼치는 일뿐이다. 그 노래는 울려 퍼져야 한다. (203쪽) 이 짧은 문장에서 헤셸은 재미있는 표현을 두 가지 했다. 1) 정기적으로 예배당에 가는 행위 자체가 예배다. 그의 ...

헤셸(35) [2]

  • 2014-04-02
  • 조회 수 1497

영감을 받는 것은 잠깐 동안이며, 때때로 일어나며, 아니 드물게 일어난다. 그 사이의 오랜 기간 동안 흔히 정신은 둔해지고 단조로워지고 활기가 없어진다. 영혼이 받은 빛보다 더 많은 빛을 발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츠봇(계명들과 종교적 활동들)을 행하는 것은 영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영은 우리가 한번 얻으면 영원히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불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203쪽) 영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영적으로 민감한 순간은 별로 길지 않다. 일단...

헤셸(34) [2]

  • 2014-04-01
  • 조회 수 1849

합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한하며 궁극적인 최고 존재가 매일 내가 기도할 때 머리와 팔에 테필린(Tefillin)을 두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 한 개인이 특수한 절기 동안 누룩을 넣은 빵을 먹든지 넣지 않은 빵을 먹든지에 대해 마음을 쓰신다고 믿는 것은 실제로 이상하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사람과 그의 유한한 행동에 친밀하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은 역설이다. 하나님의 눈에는 아무 것도 진부한 것이 없으며, 아무 것도 상관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예...

헤셸(33)

  • 2014-03-31
  • 조회 수 1532

기도하고 싶다는 나의 열망보다 더 큰 것은 내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이다. 내가 믿으려는 나의 의지보다 훨씬 더 큰 것은 내가 믿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의지다. 우주적인 과정 한복판에서 내가 기도하는 것 자체는 얼마나 하찮은가! 내가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면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 (189쪽) 많은 경우에 기도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자신의 욕구를 분출하는 통로로 작용된다.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가족과 손자 손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보살펴달라...

헤셸(32) [8]

  • 2014-03-29
  • 조회 수 1955

예배를 드릴 의무가 있다는 것, 산란해진 나의 마음에 이제는 하나님을 생각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며, 최소한 잠시 한 순간만이라도 에고(ego)를 고려하지 않을 시간이 있다는 것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가! 하나님의 뜻의 질서에 속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행복이다. (188쪽) 헤셸은 젊었을 때 독일 베를린에 가서 철학을 공부했다. 공부를 하면할수록 만족할 수 없는 어떤 한계를 느꼈다. 철학은 선(善)에 대해서 말하는데, 자신의 관심은 거룩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자연주의자가 될 수...

헤셸(31) [2]

  • 2014-03-28
  • 조회 수 1676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매일 수행 정진하라는 제안에 겁을 먹는다. 내면의 통제와 외적인 학대를 혼동하는 그들은 극기보다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려고만 한다. 그들은 규범보다는 이상을, 방향성보다는 희망을, 형식보다는 신앙을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목표와 그에 이르는 길은 오래 분리된 채로는 견딜 수 없다. 한 주간의 날들, 우리가 먹는 음식, 한 해의 절기들, 우리의 행위들, 이 모든 것들은 신앙의 미개척지들이다. 우리의 외적인 생활이 내면세계를 표현하지 않는다면 신앙심은 침체되고 또한 의도는 쇠퇴한다. (18...

헤셸(30) [5]

  • 2014-03-27
  • 조회 수 1849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이상한 점은 그들의 삶이 그들의 이념보다 고상하다는 것, 그들의 신앙은 깊지만 그들의 견해는 천박하다는 것, 그들의 영혼은 억압당하고 있지만 그들의 슬로건은 선포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40년 전에 한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 이론을 소중하게 간직해서는 안 된다. 신앙은 우리가 한번 얻으면 그대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once and for all)이 아니다. 신앙은 매순간 얻어야 하는 통찰력이다. (178쪽) ‘그들의 삶이 그들의 이념보다 고상하다는 것’이라는 말은 하나...

헤셸(29) [1]

  • 2014-03-26
  • 조회 수 1769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가리킬 개념이나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 표상할 개념은 없다. 그분의 존재는 우리의 삼단논법으로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분은 실재이기에, 우리가 그 실재에 직면하여 그 실재를 생생하게 자각하게 될 때 모든 개념들은 상투어가 된다. 진정한 기도는 개념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다. 진정한 기도는 그분에 대한 정보에서 흘러나오기보다는 그분의 신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흘러나온다. (177쪽) 하나님에 대한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잘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

헤셸(28) [7]

  • 2014-03-25
  • 조회 수 1850

거듭 말하지만, 기도의 문제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유대교는 신학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한 하나님이라는 말로 그 사람이 무엇을 뜻하든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현대에 흔히 있었다. 이제 하나님이라는 말로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무엇인가? 알맹이가 없는 일반론인가? 하나의 알리바이인가? 우리가 발전시킨 일종의 관념인가? 내가 평생 씨름해 왔던 문제는 그분께 기도할 때 내가 정말로 하나님이라는 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심지어 내가...

헤셸(27) [4]

  • 2014-03-24
  • 조회 수 1876

내가 요청하는 것은 기도의 분위기를 만들라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는 예식이나 장치 혹은 연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본보기를 통해서, 기도하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런 분위기를 우리 주변에 만들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 만들어야 한다. 랍비가 예배 출석률에 관심을 갖지 않고 대신 기도에 관심을 가질 때 그 상황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나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랍비가 유대인들의 3천 년 동안의 경험에 응답할 준비를 갖추고 참석하는 예배와 그 달에 나오는 신간서적이나 ...

헤셸(26) [2]

  • 2014-03-22
  • 조회 수 1860

오늘날 유대인들은 기도서 콤플렉스라는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 기도서의 본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안겨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의 위기는 본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문제다. 기도서를 속죄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기도서를 개정하는 것은 기도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도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영혼이며, 새로운 심장이다. 본문을 개정하는 것은 기도의 정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영적인 혁명이 아니고서는 기도를 망각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한다. (170쪽)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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