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셸(26)

조회 수 1869 추천 수 0 2014.03.22 22:23:41

 

오늘날 유대인들은 기도서 콤플렉스라는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 기도서의 본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안겨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의 위기는 본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문제다. 기도서를 속죄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기도서를 개정하는 것은 기도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도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영혼이며, 새로운 심장이다. 본문을 개정하는 것은 기도의 정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영적인 혁명이 아니고서는 기도를 망각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한다. (170)

 

헤셸의 글을 읽다보면 유대교의 문제가 바로 오늘 개신교의 문제라는 게 확인된다. 유대교의 경우에도 신자들이 기도에 부담을 느끼고 기도생활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도문을 반복해서 새롭게 만드는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이 이해하기 좋은 말로 바꾸기도 할 것이다. 헤셸은 그런 방식으로 기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방향 착오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기도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옳은 말이다. 이것은 설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청중들의 귀에 솔깃한 설교 방법을 연구 개발하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런 설교에 길들여지면 청중들은 더 자극적인 재미를 요구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삶의 재미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평생 그런 수고를 피할 수 없다. 결국 영혼이 병들게 된다. 헤셸이 말하듯이 새로운 영혼과 새로운 심장이 근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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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또다른세계

2014.03.22 22:50:57

오늘도 귀한 말씀 잘 읽고 갑니다. 

새로운 영혼과 새로운 심장을 위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평안한 저녁 시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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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4.03.23 21:28:08

주일, 잘 지내셨지요?

또다른세계 님의 커밍 아웃으로

다비아의 한쪽이 환히 빛나는 거 같습니다.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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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달가워하지 않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서 찾는다는 사실에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충실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겉으로는 이게 말이 된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덕을 아무리 높이 쌓는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런 노력은 우리를 좌절하게 하거나 교만하게 만든다.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충분히 해명했고, 루터도 오직 믿음과 오직 은총이라는 신학 개념에서 분명하게 언급한 칭의(稱義)에 대한 가르침이 그것이다.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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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소명은 한 순간의 어떤 특별한 경험이라기보다는 전체 삶에서 심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일상의 소명과 일치하는 이야기다. 삶 전체로서의 소명과 일상으로서의 소명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한 사람의 전체 삶은 일상으로 구성되며, 일상은 전체 삶에서 완성된다. 일상이 있어야 전체 삶이 가능하고, 전체 삶 안에서 일상은 의미를 얻는다. 부분과 전체가 신비롭게 연결되어 있다. 이걸 아는 사람은 삶과 일상을 수행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이나 조직이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을 억지로 떠맡거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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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은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과 관련된다. 그걸 평생 인식하고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거칠게 표현하면, 전자에 속한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고, 후자는 잠들어 있는 사람이다. 마틴 루터는 기독교인의 소명 개념을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는 직업을 가리키는 독일어 베루프(Beruf)가 ‘소환하다’는 뜻의 동사 베루펜(berufen)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모든 직업을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름이라고 말했다. 그 이전까지는 성직만 소명으로 받아들여졌다. 성직은 거룩하고 일반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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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똑 부러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할 만한 어떤 특별한 일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불러주셨지요.’라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한 것 같다. 아주 오래 전이라서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실제로 나에게는 신학대학교에 갈 특별한 동기는 없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고등학교에 갈 수도 없었다. 서울 출생이지만 여차한 과정을 통해서 경주상고를 다녔다. 상고를 다닌 덕에 부기와 주산, 타자를 배워서 지금도 좀 도움이 된다. 당시 상고 학생들은 졸업하면 대다수 취업한다. 왜 그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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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사실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는 말이 아니다. 성서를 읽을 때는 사실(fact)과 사건(event)을 구분해야 한다. 사실은 신문기자가 취재해서 보도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사건은 역사학자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성서는 사실이라기보다 사건이다. 사실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사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게 정확한 건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영어 event는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행위 같은 것들을 가리킨다. 성서의 심층을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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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을 직접 받은 이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다. 그냥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자주 나온다. 모든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대선지자 중의 하나인 이사야는 성전에서 신비한 현상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대답한다. 사 6:8절은 그걸 이렇게 전한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이 뒤로 여호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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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소명에 대해 내가 이십 대 초 신학생이었을 때, 그리고 삼십대 젊은 목사였을 때까지 처음 만난 분들로부터 들은 가장 흔한 질문은 어떻게 해서 신학대학에 갈 생각을 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떻게 받았느냐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은 일반적으로 극적인 어떤 것을 기대한다. 신학대학교에 가는 동기는 각양각색이다. 가장 흔한 동기는 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 신앙적으로 뜨거운 경험을 하는 것이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가 될 생각을 한다. 어떤 이들...

목사공부(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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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과잉 배출은 분명히 비정상적인 구조인데도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해보려는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노력을 하는 분들이 일부 있긴 하나 실제 교권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문제 해결이 요원할 수밖에 없다. 구조적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어서 어떤 뾰족한 수도 없다. 목사의 질은 떨어지고, 권위도 떨어지고, 목사들끼리의 경쟁은 심해지고, 요행이 자리를 얻은 사람은 거기에 매달리는 현상이 가중될 뿐이다. 이런 문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말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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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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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과 목사의 과잉 배출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긴 하다. 남북통일 이후 북한 지역에 달려갈 목사들을 준비시키려면 목사 배출을 좀 넘치게 해도 좋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런 말은 전형적인 견강부회다. 그런 자기 합리화로 오늘의 목사 과잉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큰 섭리는 그분께 맡기고 지금 여기서 시시비비를 가릴 건 가려야 한다. 고칠 게 있으며 고치고, 버릴 게 있으며 버리고, 필요한 건 채워야 한다. 목사 과잉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 중의 하나는 목사들끼리의 경쟁이다. 경쟁이 교회 성장의 ...

목사공부(1) [1]

  • 201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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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목사가 넘쳐난다. 목사가 활동할 수 있는 자리는 제한적이다. 목사가 됐지만 자리가 없어서 백수로 있거나 대리 운전이나 택배 기사 등, 임시로 다른 일을 하는 이들도 제법 많다. 담임 목사 자리를 구한다는 공채 광고에 사오십 명은 보통이고, 많게는 칠팔십 명이 지원한다. 요즘 젊은이들의 어려운 취업 상황과 비슷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일차 원인이다. 2천 년대에 들어오면서 교인 숫자는 정체 되거나 줄어드는데 비해서 80, 90년대 늘어난 신학생 정원 숫자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수요가 줄면 ...

<목사공부>를 시작하며... [4]

  • 2014-04-11
  • 조회 수 2662

<목사공부> 묵상을 시작하며... 매일 묵상 코너를 앞으로 당분간 <목사공부> 제목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면 그걸 책으로 묶어낼 생각입니다. 신학대학교 커리큘럼 중에는 목회학, 또는 목사학이 개설된 학교도 있습니다. 똑같은 제목은 아니라 하더라도 목사 훈련을 위한 과목은 대다수 신학교에 다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런 교과서적인 내용을 다시 정리하려는 게 아닙니다. ‘목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허심탄회하게 제기하고 나름으로 대답을 찾아볼까 합니다. 다비아의 기본 방향인 인문학적 관...

헤셸(42) [2]

  • 2014-04-10
  • 조회 수 1940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주를 지으신 것은 우리의 탐욕, 시기심과 야심을 충족시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살아남은 것은 우리가 저속한 허영심으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수백만 명이 순교당한 것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을 우리가 성취하도록 우리 자신을 성별할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토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 다가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산을 들어 올려 그 백성들의 머리 위에 들고 계시면서 “너희가 토라를 받아들이든가 ...

헤셸(41)

  • 2014-04-09
  • 조회 수 1434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실없는 말을 지껄여 왔다. 우리는 이상적인 것들을 허망한 것으로 간주해왔다. 우리가 주님을 불러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지만 우리는 그분을 무시했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 설교했지만 그분을 피했다. 우리는 그분을 찬양했지만 그분을 깔보았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실패한 것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분의 목소리는 광야에서 울부짖으셨다. 얼마나 능숙하게 그분의 목소리는 성전 안에 갇혔으며 유폐되었던가! 얼마나 자주 그분의 목소리는 다른 시끄러운 소리에 가려졌으며 왜곡되었던가! ...

헤셸(40) [3]

  • 2014-04-08
  • 조회 수 1709

예식주의는 큰 문제, 즉 오늘날 지배적인 종교 사상이 된 상징주의라는 큰 문제의 한 부분이다. 현대인은 더 이상 실재를 얼굴을 맞대고 직면하는 방법을 모른다. 현대인에게 실재의 세계는 오직 그라프와 도표, 도구와 기호를 통해서만 알려진다. (214쪽) ‘현대인은 더 이상 실재를 직면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헤셸의 진술을 이해하려면 우선 실재(reality)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대학, 직장, 결혼, 재산 등은 다 실재가 아니다. 그런 것은 다 지나간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지도 못한다. 연봉...

헤셸(39)

  • 2014-04-07
  • 조회 수 1450

우리가 성서를 문학으로 환원시키지 않도록, 유대인들의 율법 준수를 좋은 태도로, 탈무드를 예의범절 책으로 환원시키지 않도록 경계하자. (212쪽) 오늘의 유대교도 우리와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헤셸은 세 가지를 말했다. 성서를 문학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문제가 하나다. 성서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종교적 경건을 배우는 것이 바로 성서의 문학화다. 그들의 율법은 우리에게 교회생활과 비슷하다. 단순히 기독교인다운 모습을 만들어가는 게 신앙인 것처럼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뜻이다. 탈...

헤셸(38) [4]

  • 2014-04-05
  • 조회 수 1784

예배와 삶은 서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유대교는 삶의 영역에서 간헐적인 특별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찬란하게 고립된 신전들이나 혹은 특별한 날에 벌어지는 절기의 축제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회당은 은둔이 아니며, 또한 결정적인 것은 구별된 날들에 예전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절기들이 어떻게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영적인 삶의 최고봉은 반드시 드물게 찾아오는 황홀경의 순간들에서만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최고봉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간에 도달할 수 있으며 또한 일상적인 행위 ...

헤셸(37)

  • 2014-04-04
  • 조회 수 1402

윤리학의 위기는 그 뿌리가 형식주의에 있으며, 선의 본질이 선한 의도에 있다는 견해에 있다. 현대인은 선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면서 절망했다. 선한 의도라는 이름으로 악이 창궐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교리가 본질적인 이단이다. 유대교의 운명은 인간 행위의 절대적인 연관성이라는 사실과 함께 한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께도 행위가 기인하는 것으로 돌린다.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은 행위 안에 있다. 행위는 거룩함의 원천이다. (206쪽) 위 글은 앞의 글을 읽어야 좀더 생생하게 이해될 수 있다. 헤셸...

헤셸(36) [2]

  • 2014-04-03
  • 조회 수 1788

영은 우리가 성취한 것, 우리의 목표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 우리가 가는 길 위에도 있다. 이 때문에 매일 혹은 안식일에 예배당에 가는 행동 자체가 말씀 없는 노래이다. 단순한 가슴으로 겸손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마치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아이가 어머니 앞에 그 악보를 펼치는 것과 같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을 펼치는 일뿐이다. 그 노래는 울려 퍼져야 한다. (203쪽) 이 짧은 문장에서 헤셸은 재미있는 표현을 두 가지 했다. 1) 정기적으로 예배당에 가는 행위 자체가 예배다. 그의 ...

헤셸(35) [2]

  • 2014-04-02
  • 조회 수 1505

영감을 받는 것은 잠깐 동안이며, 때때로 일어나며, 아니 드물게 일어난다. 그 사이의 오랜 기간 동안 흔히 정신은 둔해지고 단조로워지고 활기가 없어진다. 영혼이 받은 빛보다 더 많은 빛을 발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츠봇(계명들과 종교적 활동들)을 행하는 것은 영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영은 우리가 한번 얻으면 영원히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불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203쪽) 영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영적으로 민감한 순간은 별로 길지 않다.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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