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표적

조회 수 2980 추천 수 0 2013.12.27 08:37:30



아래 글은 칼 바르트의 <신학묵상>에 나옵니다. 오래 전 다른 세 분 신학자들과 함께 제가 공역한 책입니다. 금년 성탄 전후에 다비안들과 함께 읽어보려고 여기에 싣습니다.

 

12월26일

 

너희는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적이다. (눅 2:12).

 

목자들이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은 성서의 신학적 의미에서 볼 때 이 아기가 구주라는, 즉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표적>이었습니다.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사람 사이에 평화가 구축되며, 따라서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 결정적인 도움과 가르침과 희망이 주어졌다는 표적 말입니다. 포대기와 구유는 바로 이런 사실에 대한 <표적>임에 틀림없습니다. 얼마나 신기한지요! 포대기와 구유는 바로 소외, 가난, 비참, 궁핍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적”이라니, 맞습니까?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참으로 하나가 된 이 기적을 누가 찾아 나서겠습니까? 이 표적은 오히려 그 반대를 언급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기절초풍에 대한 언급은 아닐까요? 위로, 가르침, 도움이 없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불화가 아닐까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늘 그렇게 살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정확하게 이 말씀을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표적이다!”라는 말에 기적이 담겨 있습니다.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구주가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런 표적에 밀착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것은 공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질문을 그만 두어야 하여 그만 둘 수 있습니다. 계시는 우리가 하늘을 쳐다본다고 해서, 또는 하늘처럼 화려하게 변화된 이 땅을 쳐다본다고 해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의 조화를 꿈꾸거나, 더 나아가 그 일치를 꿈꾼다고 해서 발견되는 게 아닙니다. 계시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게 아닙니다. 계시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계시라고 한다면 오히려 <은폐>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이나 한 인간의 천재성이 발견되고 개발되는 것처럼, 또는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는 것처럼 발견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밖에서는 열 수 없고, 오직 안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의 열림과 같습니다. 우리는 단지 표적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된 하나님이며 참된 사람>이신 그분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베들레헴의 <구유>와 <포대기>만을, 골고다의 십자가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표적에 밀착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한 것이며,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도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계시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소. 당신은 계시를 발견할 것이오. 왜냐하면 표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은폐성은 결코 어둠이나 역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폐성, 곧 그의 계시의 은폐성이기 때문이오.


그러나 과연 누가 이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찾은 평화가 종종 은폐되고 있는 마당에 어느 누가 동요하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약속을 실제로, 참되게 고수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이 세상의 일들은 이것과 정반대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계시의 기적 자체가 이런 표적을 실제로 고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왜 이런 조건이 미리 성취되면 안 되었을까요? 왜 성탄절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미리 통고하지 않아야만 했을까요? 우리가 고딕식 대성전의 정문처럼 밖에 머물러서 높은 곳의 기적만을 음미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미리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표적과 이 표적이 가리키는 분 사이의 비밀 가득한 중심에 들어가는 중이어야만 했었겠지요!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서 일어나야 할 참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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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길위의벗

2013.12.27 15:54:46

 하나님에 대하여 질문을 할 때,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부활의 생명으로 창조하지 않았는가?’,
‘부활의 삶에서도 우리의 의지는 그대로 남아있는가? 그렇다면, 순종하는 의지만 남아있는가?’
등의 질문들 앞에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답을 하더라도 교리적이고 피상적인 대답만 할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정직하게 말을 한다면,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겠지요.

 “계시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게 아닙니다.
계시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계시라고 한다면 오히려 <은폐>되어 있습니다.”
라는 칼 바르트의 말이 참 와닿습니다.
우리가 만약 실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떠한 것을 얘기할 수 있다면,
그 어떠한 것은 분명 하나님일 수가 없겠지요.
진정한 하나님(진리)이라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을 테니깐요.

 며칠 전 非그리스도인인 친구와의 대화에서 제 한계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당연하게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논리적인 증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가 제게 “만약 명확한 근거가 없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면,
가상의 어떠한 신을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라며 반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렇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증명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명확한 증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다만, 구약 성서의 저자들과 신약 성서의 저자들
그리고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고백된 하나님의 흔적을
내가 발견했기 때문에 신앙이 가능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이라면, 한 개인이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고,
다만 인류가 역사(그리스도를 포함)와 자연 즉,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일 테지요.
표적을 통한 경험의 축적이 기독교 역사이며, 성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 신앙의 신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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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12.27 23:31:44

와, 엔크리스토 군이 이미 신학자가 다 되셨소.
'아, 신앙의 신비여!'라는 외침이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이면 신학자요.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도 그런 외침을 내지른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걸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가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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