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의존할 것

조회 수 2785 추천 수 0 2014.01.03 23:31:04

 

1월3일(금)

 

성령에 의존할 것

 

신앙생활에서 성령에 의존한다는 말보다

더 오해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저 말이 자칫 독선을 합리화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런 경향이 없지 않다.

음악적 영감(inspiration)에 사로잡힌 작곡가처럼

일상과는 다른 소리를 들으니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교회에서도 성령 운동(?) 하는 분들은

짐짓 신령한 태도를 취한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홀리보이스(holy voice)로 바뀐다.

기도를 많이 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성령에 취했는지 악령에 취했는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서 나타나는 현상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각각 나타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악령으로도 병을 고친다.

마지막 때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그런 능력을 보인다고 복음서가 밝히고 있다.

이미 초기 기독교 당시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성령에 의존한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성령이 누구냐, 또는 무엇이냐를 물어야 한다.

이 자리에서 그걸 다시 말하지 않겠다.

그것을 주제로 한 책은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다.

성령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기에

종말이 오기 전에는 다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도 여기서는 짧게나마

성령에 의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야겠다.

이것은 성령에 대한 여러 이해 중에서 한 가지다.

성령에 의존하는 사람은 자기 삶의 무게를 미래에 둔다.

성령은 곧 종말의 영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단순하게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으나

그 깊이로 들어가거나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건 쉽지 않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현재를 초월하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지금의 모든 것은 결국 미래의 힘에 굴복당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에게 미래는 부활이다.

만약 그 사실을 막연하게 받아들이기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깨닫고 동의하고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현재를 초월할 것이다.

 

이런 성령 의존성이 설교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위의 설명과 직접 연관이 없을지 모르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정리하겠다.

내가 성령에 더 의존적인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려고 애를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은혜는 내 소관이 아니라 진리의 영인 성령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혜는 설교 듣는 그 순간에 당장 일어나는 게 아니라

훗날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에 의존하는 설교자는

미래를 내다보고 설교하게 될 것이다.


[레벨:18]부스러기 은혜

2014.01.04 09:06:37

"너 예수를 믿어도 밥은 먹고 살아야한다
너 예수를 믿어도 명문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사람 구실하고 산다"

우리가 자녀를 신앙적으로 가르치며 산다고 자위하면서도, 무의식중에 자식을 그리 가르치고 있겠지요?

여전히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을 더 두려워하고 있고, 보이지 않는 그 분보다는 보이는 세상의 교훈과 풍조에 함몰되어 살면서도, 나름 경건의 모양만은 늘 유지해가는
그 신묘방통한 신앙적 처세술을 우리 자식들도 간파하고 있겠죠?

눈에 보이는 변덕스런 세상사에 따라
신앙 또한 매일 요동을 치고 있는데,
세상이 전부이기에 그 세상 앞에서 두려워떨며 살아가는 저 믿지않는 자들과의 가시적 차별성이 그닥 없는 저의 모습을 보며
도대체 믿는 자의 유익이 무엇인가?
의문과 자책에 늘 갈등하고 있는 제게

"성령에 의존해 사는 자는
요동치는 오늘 일에 연연해않는다
오늘을 초월하며 산다
삶의 목표를 미래에 두고 산다
그렇게살지 않음은
그 사실을 막연하게 받아들이고 살고 있기때문이다"는 말씀이 대못을 박습니다

그럼 어찌해야 그 사실을 막연히 안받아들이고, 코페르니쿠스적 개벽을 할수 있나요?

갈릴리 호수가에서 빈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가
주님을 알아본 순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과 함께
잡은 물고기를 다버려두고 주님을 좇은
혁명적인 거듭남은
소위 한 큐에 일어날수 있는 일이 아닌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4.01.04 15:11:14

ㅎㅎ 한큐, 멋진 표현이네요.
물론 아니지요.
동시에 그렇기도 하구요.
모든 배움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에서도 비약은 없어요.
그런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이야기도 실제는 다른 거에요.
베드로가 예수의 부름에 한큐로 모든 걸 버려두고 따른 건 아니에요.
제자가 되는 과정이 있는 겁니다.
요즘 제가 루터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루터가 어느 시점에서 종교개혁의 불을 당긴 아니에요.
정말 많은 우여곡절 긑에 종교개혁 운동이 자리를 잡은 겁니다.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경험도 일순 간에 일어난 게 아니에요.
어느 순간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다 과정 안에 있는 거에요.
등산할 때 오르기도 하지만 내려가기도 하고,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정상을 향해 가는 것처럼
신앙 과정도 비슷하니,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모든 기독교인이 영적 등반의 정상에 오를 수는 없어요.
체력이 안 되는 사람은 낮은 산에 올라가면 되지
높은 산을 오를 수 없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바둑도 그렇습니다.
5급 수준의 사람이면 그 정도에서 즐기면 됩니다.
프로 9단처럼 바둑의 수를 볼줄 모른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꾸준한 노력은 필요하겠지요.
5급에서 4급으로, 거기서 1급으로...
그렇게 가다가보면 아마추어 5단은 딸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프로기사가 되는 사람은 드믄 것처럼
모두가 영성에서 프로가 될 수는 없어요.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아마추어와 프로는 관점이 다르답니다.
저도 사실은 신학, 영성에서 아마추어에요.
좋게 봐주면 아마추어 상급자라고 할 수 있어요.

즐겁게 사세요.
세속적인 열정에 빠져도 괜찮습니다.
방향만 분명하다면 다시 길을 찾게 될 겁니다.
오늘 한 수 배웠습니다.
한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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