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놀다

조회 수 2715 추천 수 0 2013.08.30 23:04:17

8월30일(금)

 

풀과 놀다

 

풀이 얼마나 빠르게 자라는지는

촌집에서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실감하지 못한다.

보통 때도 쑥쑥 자라지만

비가 온 뒤는 자라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우리 집 앞마당은 잔디를 심었는데,

다른 풀도 곳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그걸 다 뽑아내기는 불가능하다.

보기 흉하지 않을 정도로만 처리한다.

잔디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곳에는

다른 풀이 침범을 못한다.

침범해도 조금만 손질을 해주면 별 문제가 안 된다.

뒷마당은 정말 꼴불견이다.

정화조 뚜껑이 두 개,

맨홀 뚜껑이 하나,

정화조 가스 배출관이 하나 있다.

모기 때문에 뚜껑은 흙으로 덮었고,

배출관은 모기장으로 씌었다.

다 보기 싫은 모습들이다.

지난 3월에 이사 와서 살기 전에는

뒷마당을, 정확하게는 옆 마당을 텃밭으로 사용했었다.

올해는 앞마당에 작은 텃밭을 만드는 바람에

옆 마당의 텃밭은 포기했다.

풀이 장난이 아니다.

쑥이 저렇게 크고 억세게 자라는지 몰랐다.

얼마나 자라나 그냥 내버려둘까 생각했지만

자칫 하다가는 들짐승들을 내려올까 염려되어

시간이 나는 대로 풀을 손으로 뽑거나

낫으로 잘라낸다.

오늘도 저녁나절에 두 시간쯤 옆 마당을 손질했다.

비가 온 다음날 풀이 잘 뽑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해도 표도 잘 안 난다.

그래도 나중에 보면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

이제 마음을 바꿨다.

이 모든 작업이 풀과 노는 거라고 말이다.

귀찮은 일이지만

노래를 부르며 해보자고 말이다.

위 아래로 두꺼운 옷을 껴입고

피부가 노출되는 곳에는 모기 퇴치 약을 뿌렸더니

오늘은 모기에 한 방도 물리지 않았다.

주님, 고맙습니다.


[레벨:18]天命

2013.08.31 04:10:36

아, 풀이라고 하시니 신이 납니다.
저는 서울에 살지만 매일같이 풀을 만지고 삽니다.

목사님께는 풀이 골치꺼리지만
저희집 옥상의 닭들에게는 풀이 중요한 식량거리입니다.

저는 일주일에 적어도 두 차례는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 샛강으로 나가서 닭들에게 줄 꼴을 한 자루씩 베어옵니다.
그걸 작두로 썰어서 비닐 봉지에 넣어 김치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는
정확하게 오전 오후로 하루에 두 차례씩 이 풀들을 뿌려줍니다.

놀라운 것은 새로 태어난 지 3일밖에 안된 병아리들이
잘게 썰어준 풀들을 그렇게도 잘 먹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TV를 보면 돼지들도 풀을 그렇게 잘 먹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이 풀들을 잘 먹어야 건강하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는 길이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사실도..  

잡초를 뽑아 한 곳에 모아두고는 거기에 em 발효액을 뿌려 두고
비닐로 그 위를 덮어 두면 요긴한 유기질 비료가 생산됩니다.
소위 퇴비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걸로 채소 농사를 지으면 참 좋습니다.
그 성분이 그 성분이니까요.

저희집에서는 그 유기질 비료 생산이 바로 닭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 사실 !
이게 바로 도심 옥상에서 김장거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이게 진짜 풀과 즐겁게 놀고 있는 황홀한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삭막한 도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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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08.31 10:33:13

천명 님의 그 친생태적 세상살이가 부럽고 멋집니다.
옥상까지 풀을 들어올리기가 만만치 않으실 텐데,
혹시 관절이 삐끗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박두규 시인의 <풀을 뽑으며>라는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틈이란 틈, 지상의 모든 빈자리를 비집고 올라오는 이것.
그대를 깜빡 놓친 어느 저녁의 틈새에도
내 안의 어딘가로 잠적한 오랜 시간들에도
풀은 벌써 무성하게 올라와 있다.
언제 어디서 무엇에게도 굴하지 않고
틈을 메우는 저 무서운 망각의 혼령들.

풀은 반드시 뽑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틈만 나면 뽑았다.
하지만 뽑으면 뽑을수록
풀의 죽음이 당연하면 당연할수록
언젠가부터 조금씩 풀의 죽음이 부담스러워졌다.
지금껏 풀로부터 지켜온 나의 영역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내 안에 갇혀 있는 오래된 시간들이 불편해지면서
무엇인가를 고집하는 일이 우울해졌다.

그래서 틈이란 틈, 지상의 모든 그리움의 빈자리를
비집고 올라오는 저 풀들에게
차라리 자리를 내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내 영역을 지우는 것만이
세상의 경계를 지우는 길이라는 말을 생각하며.
내 오랜 그리움도 어쩌면
하나의 경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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