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삶(12)

  • 2013-09-27
  • 조회 수 2444

9월27일(금) 삶(12)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지금 우리의 삶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뚫어보아야 한다. 그게 없으면 저런 주제에 얽힌 기독교 교리는 관념에 떨어진다. 삶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렇게 깊은 사색이 없어도 웬만한 통찰력만 있으면 알게 되어 있다.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또 다시 배가 고프고,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여전히 외롭고, 아무리 건강식품을 챙기고 운동을 열심히 해도 병이 걸릴 사람은 병에 걸리고 죽을 사람은 죽는다. 우리의 유한하고 잠정적인 ...

삶(11) [2]

  • 2013-09-26
  • 조회 수 2369

9월26일(목) 삶(11) 어제 수요 성경공부에서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인 생명에 대해서 내가 거기 모인 분들에게 질문했다. 예수가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이 말로가 아니라 실제로 이해가 되고 느껴지시는가? 간증 류의 대답은 다 알고 있다. 예수를 알고 기쁨이 넘치게 되었다거나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거나, 또는 죽음 이후의 생명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게 틀린 대답은 아니나 그런 대답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단지 교리를 외우고 있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교리가 아니라 실질적인 대답이 필요하다. 그것...

삶(10) [2]

  • 2013-09-25
  • 조회 수 2498

9월25일(수) 삶(10) 숲을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잘 알려면 가까이 가서 나무를 살펴야한다는 말이 있다. 멀리서 보면 나무를 구분할 수 없지만 가까이 가면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멀리 숲도 보고 가까이 나무도 보라고 한다. 삶을 이해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형이상학적으로 보는 게 숲을 보는 거라 한다면 일상적인 현실을 보는 게 나무를 보는 거다. 양쪽의 관점이 조화를 이뤄야 인간 삶을 비교적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너무 일상적인 현실에 치우치면 현실주의자가 되고 너무 형이상학적인 관점에 치우치면 이상주의...

채동욱 [2]

  • 2013-09-24
  • 조회 수 2933

9월24일(화) 채동욱 채동욱은 지금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검찰총장이다. 벌써 일주일 여 전에 사표를 냈으나 대통령은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있다. 식물 총장인 셈이다. 좀 웃기는 시츄에이션이다. 이런 이야기는 신앙문제를 주로 다루는 매일묵상으로보다는 세상읽기나 다른 메뉴로 올리는 게 좋은데,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려니 여기에 올릴 수밖에 없다. 다비안들의 이해를 바란다. 장관이나 검찰총장 등이 사표를 내면 일반적으로 즉각 반려하든지 수리하든지 한다. ...

밥과 말씀 [6]

  • 2013-09-23
  • 조회 수 2895

9월23일(월) 밥과 말씀 “밥이 바로 그 사람이다.”는 말을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듣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저 밥은 쌀로 만든 그 밥만이 아니라 먹을거리 일체를 가리킨다. 채식을 주로 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채식의 사람이 되고 육식을 주로 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육식의 사람이 될 것이다. 절간의 음식은 주로 담백한 채식으로 만들어진다. 삶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음식을 먹는 게 아니겠는가. 군것질이나 편식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그런 식의 청소년으로 자랄 것이다. 그가 먹는 것이 그를 ...

믿음과 우상숭배 [2]

  • 2013-09-21
  • 조회 수 4594

9월21일(토) 내일 설교는 9월 첫 주일에 이어서 예레미야서가 본문이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 앞에서 그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한다. 목전에 처한 조국의 패망 원인이 우상숭배라는 그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이 문제를 풀어가려면 선지자들의 독특한 영적 통찰력이 무엇인지, 우상숭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낱말풀이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죽음과 인간 문명과 그것의 속성들이 다 연루되어 있다. 설교 시간에 이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해명할 수는 없다...

삶(9) [2]

  • 2013-09-20
  • 조회 수 2454

9월20일(금) 삶(9)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인간은 왜 죽어야 하나? 여기서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모든 피조물의 숙명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죽어야 할 뿐이다. 인간만 죽는 게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탄생, 노화,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을 간다. 생명체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런 숙명에 놓여 있다. 태양도 노화되고 죽을 것이다. 다른 별들도 다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실제...

삶(8)

  • 2013-09-19
  • 조회 수 2340

9월19일(목) 삶(8) 어제는 영생 이해가 시간 이해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연대기적인 시간 이해에 떨어지면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히 지속되는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런 상태는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이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실제로 죽지 않을 운명으로 산다면 인간은 허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죽음을 구원으로 여길 것이다. 부모도 죽고, 스승도 죽고, 친구도 죽고, 자식도 죽는데 자기 혼자만 쨍쨍하게 살아있다고 생각해보라. 연대기적인 시간 이외의 시간을 모르기에 지금 우리는 영생을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성경은 왜...

삶(7)

  • 2013-09-18
  • 조회 수 2559

9월18일(수) 삶(7)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이 진술은 우리의 경험과 배치된다. 예수를 믿은 수많은 기독교들 중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고, 지금도 계속 죽어갈 뿐이다. 그렇다면 이 진술이 말하는 영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게 분명하다. 우선 영원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보라. 이것을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의 연장으로 보면 곤란하다. 그런 시간의 연장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듯이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진행되는 ...

삶(6) [4]

  • 2013-09-17
  • 조회 수 2477

9월17일(화) 삶(6) 오늘 생후 4개월 된 아기를 보았다. 대략 3시간 쯤 옆에 머물렀다. 그 사이에 150-180 씨씨 정도 되는 우유를 두 번이나 마셨다. 그 마시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한지 옆에서 보고 있던 나까지 저절로 삶의 에너지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저래서 젖 먹던 힘을 낸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저 아이는 지금 삶의 힘에 사로잡혀 있기에 주변 세계에 대한 불안도, 의심도, 걱정도 없다. 무엇을 마시는지, 무엇을 먹는지, 입는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이 없다. 그런 것 자체를 모른다. 오직 살아있음에만 본능적으로 ...

죄와 고 [2]

  • 2013-09-16
  • 조회 수 3058

9월16일(월) 죄와 고 어제 설교 중에 죄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불교의 고(苦)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말했다. 고는 ‘괴로워하다’, 또는 ‘쓰다’는 뜻이다. 삶이 고해와 같다는 말도 한다. 여기서 고는 불행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행복하다고 여기는 모든 삶의 조건들도 결국은 사람을 얽매기 때문에 사람은 한평생 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좋은 대학교에 가서 연봉 높은 직장에 들어가고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딸 잘 키운다고 해서 우리가 고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조금 더 깊은 차...

죄인 중의 괴수 [4]

  • 2013-09-14
  • 조회 수 4906

9월14일(토) 죄인 중의 괴수 내일 설교의 성서 본문에는 바울의 이런 고백이 나온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꽤나 잘 알려진 구절이다. 역시 바울은 죄에 대한 인식이 남다르게 통절하구,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 구절을 놓고 설교하는 사람은 청중들을 향해서 바울을 본받으라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라고 목청을 높일 것이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자기의 죄를 종이에 나열하거나 하면서 눈물, 콧물까지 흘릴지 모르겠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면 오해다. 성서는 파렴치한 행위를 죄...

삶(5) [2]

  • 2013-09-13
  • 조회 수 2479

9월13일(금) 삶(5) 삶은 ‘사는 것’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우리말이다. 한자로는 생(生), 또는 생명(生命)이다. 영어 life, 독어 Leben이 이에 해당된다. 어원적으로 보면 삶은 숨과 연관된다. 숨을 쉬어야 삶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루아흐와 헬라어 프뉴마는 영, 바람, 숨이라는 뜻이 있다. 우리나라 말과 어원적으로 비슷한 구조다. 삶은 생명, 살아있음의 문제다. 루아흐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 고대인들은 바람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 우리가 세상을 계량적 차원...

삶(4) [7]

  • 2013-09-12
  • 조회 수 2842

9월12일(목) 삶(4)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현존재(Dasein)로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이다. 인간을 현존재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만이 사유를 통해서 존재를 존재로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현존재 개념보다는 세계내존재 개념을 좀더 따라가려고 한다. 그게 삶 문제와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핵심적으로 두 가지다. 1) 세계내존재는 인간이 세상을 대상으로 경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와 달리 세상을 대상으로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저것은 구름, 이것은 나무, 또 저것은 강이나 새라고...

삶(3)

  • 2013-09-11
  • 조회 수 2298

9월11일(수) 삶(3)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삶을 습관적으로 대한다. 좋은 습관도 있긴 하다. 공부 잘 하고 돈 잘 벌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좋은 습관들이다. 문제는 습관을 절대화하는데 있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의심해보지도 않은 채 그냥 그렇게 믿고 산다.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된다. 다만 삶에 대한 참된 경험은 포기해야 한다. 삶에 대한 경험은 습관으로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습관에 충실해서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돌아갈수록 삶의 본질에서는 멀어질 염려가 있...

삶(2) [4]

  • 2013-09-10
  • 조회 수 2789

9월10일(화) 삶(2) 우리는 지금 살아있지만 곧 죽는다는 것도 분명하다. 죽는다는 게 실감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지금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으니 말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 삶을 누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삶의 태도를 뭐라 할 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그래서 현재의 삶을 비관만 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다. 정당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자.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지금 살아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삶은 교수대로 불려갈 순간을 기다...

삶(1) [4]

  • 2013-09-09
  • 조회 수 2573

9월9일(월) 삶(1) 나는 죽을 때까지 ‘삶’이라는 주제 하나로 글을 써도 아마 다 쓰지는 못할 것이다. 삶의 부분적인 현상은 조금 경험했지만 그것의 궁극적인 실체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완전한 대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삶을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은 마치 없는 대답을 찾으러 나서는 것과 비슷하다. 헤매다가 중간에 쓰러지지 않겠는가. 그래도 찾으러 다니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너무나 쉬운 대답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삶을 선물로 주셨다...

제자 되기, 가능한가?

  • 2013-09-07
  • 조회 수 2688

9월7일(토) 제자 되기, 가능한가? 내일 설교 본문을 해석하기가 만만치 않다. 예수는 가족도 미워하고 모든 소유도 포기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셨다(눅 14:25-33). 출가 수도승이 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가족을 미워하고 소유를 포기한 채로는 일상을 살아갈 수 없지 않은가. 이 말씀을 종말론적 명령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종말이 오긴 전인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지만 종말에서는 가능한 말씀이라고 말이다. 또는 이 말씀을 일반 대중을 향한 게 아니라 12 제자를 향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님...

손(5)

  • 2013-09-06
  • 조회 수 2069

9월6일(금) 손(5) 아래의 글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하나님 이야기> 15-17쪽에 나오는 하나님의 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읽기에 따라서 조금씩 달리 전달되겠지만, 하나님의 손이라는 발상이 재미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니 분명히 뭔지 활기 있고 새하얀 것이 한 줄기 아련한 광채처럼 스칸디나비아 지방을 춤추듯이 오락가락하고 있었습니다. 그 근방은 이미 그 즈음부터 지형이 무척 둥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이 나서, 성 니콜라우스에게 ‘내가 창조한 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손(4) [2]

  • 2013-09-05
  • 조회 수 2384

9월5일(목) 손(4) 예수는 출가 전까지 아버지 요셉에게서 목수 일을 배우면서 살았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것에 대해서 직접 발언을 하지 않지만 요셉이 목수였다는 것은 자주 거론한 걸 보면 간접적으로 그것을 인정한 게 분명하다. 예수는 출가 전까지 목수로 살았다고 말이다. <희랍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스코 카잔치키스는 놀랍게도 <예수의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도 썼다. 거기서 첫 장면은 무장 독립을 운동을 하던 아들이 로마의 십자가형에 처형당하는 날 어떤 여인이 십자가를 만든 사람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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