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깎으며...

조회 수 3102 추천 수 0 2013.08.16 23: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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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깎으며...

 

어제 감자 껍질을 칼로 깎았다.

원래는 안전하게 감자 껍질 깎는 칼로 깎았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일반 칼로 깎았다.

그러다보니 껍질이 좀 굵게 깎였다.

감자 살이 아까웠다.

가장 친환경적으로 깎으려면

감자를 물에 잠깐 불렸다가 수저로 긁어내는 거다.

그러면 감자 살이 전혀 묻어나지 않은 채로

겉껍질만 벗겨낼 수 있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나 누님들이 그렇게 하는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유럽 사람들의 주식은 빵과 감자다.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오리고기도 잘 먹긴 하지만

식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건 주로 빵과 감자다.

나는 어제 감자를 깎으면서 갑자기 이런 장면이 떠올랐다.

옛날 어느 가난한 집에서

공교롭게 감자 흉년이 든 어느 해의 저녁 때

엄마가 마지막 남은 감자 다섯 알을 쪄내고 있었다.

그게 그 집에 남아 있는 마지막 먹을거리였다.

감자 껍질을 깎는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우리의 경우로 바꾼다면

보릿고개 시절에 마지막 남은 보리 한 사발로

깡보리밥을 짓던 엄마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그 이후에는 대책이 없다.

산으로 나무뿌리를 캐러가든지

남의 집에 동냥을 얻으러 가야 한다.

그걸 생각하니 어제 깎은 감자가 너무 귀해보였다.

 

언젠가 우리 앞에는 마지막 감자가,

또는 마지막 밥 한 그릇이 놓일 것이다.

멀리 보면 지구가 더 이상 먹을거리를 생산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며,

가깝게 보면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는

마지막 감자로 연명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실존적으로 보면 부자건 가난한 자건

죽음 목전에서는 더 이상 먹지 못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 순간이 그렇게 멀지 않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은 귀하다.

흔해 보는 것들이 더 귀하다.

나는 어제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만지듯이

감자를 하나님의 몸과 피로 느끼면서 만졌다.

여전히 칼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레벨:21]beginner

2013.08.17 09:14:22

어릴 적 시골에선 모내기할 무렵 새참(간식)으로 감자를 삶고 막걸리랑 먹었습니다.
금방 캔 감자는 옹기에 넣고 물을 부은 뒤 밟아주면 저절로 껍질이 벗겨졌지요.
삶은 감자를 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밀가루에 버무려 채반에 찌기도 했습니다.
그 구수한 냄새가 생생한데 벌써....
그렇군요. 목사님.
마지막 감자는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군요.
목사님 덕택에 추억을 먹으며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채
오늘 점심은 옛날 엄마가 하시던 대로 감자 썰어 밀가루 버무려 쪄서 먹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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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08.17 10:14:59

교회에서 점심을 감자로만 한번 먹으면 어떨까요?
방법을 찾아보세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네요.

[레벨:14]Lucia

2013.08.18 09:47:55

감자를 깎으면서도 이렇게 많은 논리를 펼치시다니
참~ 언어로 요리를 하시는 느낌입니다.
마지막감자의 의미가 현실에 와 있는데
가게를 재계약 하는 문제가 제게는 그렇습니다
보릿고개를 넘겨야 하는데 말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3.08.18 23:05:44

이렇게 낮은 덥지만 밤은 시원한 늦 여름철 밤에 
정다운 사람들끼리 오손도손 모여 앉아
찐 감자를 먹으며
삶, 세상, 하나님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떨지요. 
언제 한번 원당에서 감자 파티를 해야겠네요. 
그때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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