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

조회 수 3521 추천 수 1 2010.04.02 23:07:16

 

오늘이 성금요일이라는 사실을 그대도 알고 있을 거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날이라오. 그대에게 아주 초보적인 질문을 하겠소이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고 생각하시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우리는 알고 있소.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소이다. 첫째는 십자가 처형이 실제로 인류 구원의 길이었다면 예수님은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것을 피하고 싶다는 기도를 드렸을까, 하는 거요. 둘째는 십자가 처형이 일어난 뒤에도 인류가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오. 첫째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니 접어두고 둘째 문제만 조금 더 설명해 보리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우리의 신앙과 실제로 인류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이 현실 사이에 놓인 틈을 보시오. 양자는 각각 옳소. 그러나 서로 결합되면 충돌하오.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말은 그 십자가 사건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났다는 뜻이라오. 성서는 인간의 죄를 무겁게 다루고 있소.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오. 그리고 죄는 교양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이라오. 십자가 사건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났다는 말은 오직 그것만이 인간 구원의 길이라는 뜻이라오. 우리는 바로 그 사실에 우리의 운명을 건 사람들이오. 그것을 우리의 실존 전체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삶은 죄와 죽음의 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딜레마라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받았으나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이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허무하고 좌절하기도 한다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소? 그 대답은 그대가 찾아보도록 하시구려. 나도 잘 모르니.(2010년 4월2일, 금요일, 꽃을 피우기 위해 햇살 가득한 날)


[레벨:9]용남군

2010.04.02 23:32:27

근본적으로 되물어보면 어떨까요? “과연 실제(real)로 인류가 구원 받지 못했을까?”

지금 세상에 유행하고 있는 인문학의 입장에서는 이 외면상 고단한 삶을 현실로 보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무엇이 현실인지를 이야기할 때 조금 다른 시각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목사님의 “우리의 삶은 죄와 죽음의 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라는 언급은

예수의 십자가로 죄와 죽음의 권세가 근본적으로 허물어졌다는 복음의 논리엔 알맞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그렇게 죄와 죽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시각은 ‘주류 인문학계’의 패러다임일 뿐 아닐까요?

예수는 분명히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 6:35)라고 파격적인 선언을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당시 상황으로서도 극단적으로 보이도록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 11:25-26)라고까지 말한 바 있는데,

거룩한 영의 생명 운동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굳이 일반적인(?) 인문학의 실존론 눈치를 봐야 하는지,

그런 길 위에서 과연 예수가 꿈꾸었던 생명의 열매가 맺혀질 수 있을지 다소 의문입니다.

이 문제는 다비아에서 추구하는 ‘인문학적 성서읽기’의 속성이 과연 무엇인지로도 연결될텐데요,

정 목사님의 의도는 보편적인 인문학의 지평에 성서 자체를 던져넣는 진리논쟁적인 해석학으로 보이는데,

제 경우엔 성서의 계시의 권능이 인문학의 지평을 정복해가는 아방가르드적 해석학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류’가 이야기하는 구원보다 ‘주-예수’에 의해 선포된 구원이 더 확실한 게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평행선을 달리는듯한 땅과 하늘로부터의 두 구원론이 어떻게 맞닿으며 발현될 수 있을지,

의문과 함께 조심스럽게 화두를 던져 봅니다. 평안한 밤 보내십시오.

[레벨:10]차성훈

2010.04.03 02:22:29

(다들 잊고 있었지만, 사흘 후 예수께서 부활하시죠.)

그 사흘의 기다림 동안 제자들(정확히 말하자면, 패닉에 빠진 제자들과 슬픔과 두려움에 잠긴 이름 없는 이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불안과 허무와 초조함....

 

사흘 후에 다시 만나죠.

[레벨:8]광토

2010.04.03 06:41:04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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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2010.04.03 21:12:49

우리들의 딜레마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를 보아야 했던

그리고 도망해야 했던 그들의 딜레마..

그래도 저는 과거에 이미 일어난 부활사건을 믿게 됐음이 오히려 감사합니다.

오늘 이 곳도 햇살이 환합니다. 

죽음이 아닌 다시 살아남을 기대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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