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무, 3월21일(목)

조회 수 3535 추천 수 3 2013.03.21 23:44:13

 

   이번 학기에 다시 <신학과 철학>이라는 과목을 영남신학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강의 중에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경구를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Warum gibt es Überhaupt Seiendes, und nicht viel mehr nichts?” 이 문장은 대충 다음과 같은 뜻이다. 존재자들(Seiende)은 도대체 왜 존재하고, 무(nichts)는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가? 우문처럼 들리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존재와 무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철학적 통찰이다.

   보라. 고양이는 존재한다. 그리고 개나리도 존재한다. 그런데 고양이와 개나리의 중간쯤 되는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없는 것은 무다. 왜 무는 없는가? 왜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는가? 그게 당연한 게 아니다. 이 세상의 존재하는 것들은 우연한 결과다. 그 우연은 신비이고, 그 신비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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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2013.03.22 00:04:05

'그 우연은 신비이고, 그 신비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이 한문장 다시 생각하며, 오늘 매일묵상을 시작합니다.

가톨릭 미사 성례전 때, 사제가 이런 말을 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이 압축된 단어가 얼마나  깊은 말인지 다시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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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03.22 23:11:23

'신앙의 신비여...'
멋진 표현이군요.
나에게 그런 신앙의 차원이 열려 있는지
다시 깊이 성찰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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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임마누엘

2013.03.22 10:18:45

요즘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있는데요.
그 사람도 유전자의 진화를 우연의 결과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 우연의 해석방식이 다르더군요.
자연선택이라는 것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것을 근거로 무신론을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사람이 어느분야의 박사이면 다른 분야에도 박사인지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분도 좀 그렇더군요...

같은 우연을 놓고도 이렇게 해석이 다르다는데 참으로 세상의 신기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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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03.22 23:13:21

도킨스 같은 분들은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는 거지요.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교회 현상을
기독교 자체로 보는 거에요.
자신이 확실히 아는 것만 말하면
훨씬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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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13.03.23 19:53:12

신앙의 신비여~~
그 다음 신자들의 화답송으로 이렇게 이어지더라구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의 오심도,
주님의 죽음도.
그 죽음을 전함도
그리고 주님의 부활도
또 그 부활을 선포함도
몽땅 다 신비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 세상은,
모두 '(신앙의)신비'라는 생각이 번뜩 드네요.

신비의 세상에
묻혀 있는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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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우쿵

2013.03.26 09:29:28

예, 라라 집사님
성공회 예전도 거의 똑 같습니다.

성찬 제정과 축성문

................................................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이어지는 신자들의 화답송)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신앙이 신비인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신비인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신비이기 때문에
모른다는 말로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이 모름의 경지에 이를 때 인간은 비로소 신앙의 신비에
도달하게 되며, 마침내 "신앙의 신비여"라고 외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기도하게 된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생이 신비임을 아는 사람들의 것이다.

인간은 신비를 캐내어 신비로운 면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은 신비를 밝힐 수도 없으려니와) 자신을 신비로
몰입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면서 회개하라고 하신 것은
인간의 사고로 모든 신비를 밝혀낼 수 있다고 믿는
오만에서 벗어나 신비를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신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신앙을 요구한다.
종교를 찾는 것은 사색하고 철학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으로써는 하나님도 인생도 사랑도 그리고 모든 것이
신비라는 것을 체험할 수 없다. 종교를 찾는 것은
자신을 신비로 몰입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예수를 사는 이유 / 이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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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13.03.26 15:54:02

우쿵님,
평안하시지요?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이네요.
고난주간에 깊이 음미해 봐야 할 말씀입니다.
특히.. 제겐
신앙의 신비를 받아 드리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기도하게  된다는 말씀이,
사실,저는  아직도 기도가 어려워서요.-진짜 어려워요. 
이런 말씀은 제게 너무 부담되는 말씀이어요.
다만, 어떤 형태로든.. 요 말씀에는 조금은 위안을 받게 되네요. ^^

이제민 신부님의 책을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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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우쿵

2013.03.26 16:40:18

라라 집사님,  이제민 신부님이 쓴 책이 여러 권이나
마침 부활절이 다가오니 사이 너머(이전 크리스찬 아카데미?)
총서 제1 권인 "내가 믿는  부활"을 추천합니다.

저는 작년 12월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 마무리를
못했습니다.  이 책에는 이제민, 서공석, 정양모 신부를 포함한
13명의 가톨릭, 개신교 신학자의 부활관과 대담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사이 너머 총서 첫 번째 책.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전 인류가 고민해 온 가장 뜨거운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부활은 물리적인 사실이고 실제인가?
아니면 상징인가? 사실 생각보다 ‘부활’은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보통 장례식에서 “죽음 몸이 무덤에서 부활해 그날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목회자의 설교를 듣게 된다.
이 말은 과연 ‘사실’일까. 유한한 생명인 우리는 무덤에서
다시 몸을 얻어 살아나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부활은 무엇인가?
‘부활’이라는 명제가 펼쳐놓은 지평은 너무나 깊고 넓어서
우리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신앙 언어와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새겨야 하는 실존 언어 사이에서 그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를
대표하는 신학자와 목회자의 지성적이면서도 실존적인 부활 논의를
이끌어냄으로써, 부활 신앙의 참뜻을 묵상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기획되었다.
 

책을 펴내며: 나의 부활신앙은 어느 좌표에 잇대어 있는가? / 이정배

1.생명은 경이롭고 죽음 이후는 신비롭다 / 김경재
<토론> 부활, 우리 삶을 바꾸는 로고스가 될 수 있는가

2.부활언어의 실태와 나의 신앙 / 서공석
<토론> 부활은 상징 언어인가, 사실 언어인가

3.부활과 하느님 나라 / 유경재
<토론> 부활 논의의 관점들

4.나의 종생, 나의 부활 / 정양모
<토론> 죽은 자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

5.부활에 대한 통전적 이해 / 이계준
<토론>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부활

6.내가 어제 믿은, 그리고 오늘 믿는 부활신앙 / 심상태
<토론> 아가페적 삶과 우주, 내재적인 부활

(중략)

12.여성 신학자의 눈으로 본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 최영실
13. 내가 믿는 부활 삶의 신학 콜로키움에 참석하고 / 최혜영

종합토론 다시, 부활이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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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우쿵

2013.03.26 07:18:33

존재-우연-신비-하나님
이런 연결 구도에서 본다면, 떠오르는 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AD 1260-1328)
독일의 신비사상가이자 도미니크 수도회의 영적 지도자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존재(있음) 그 자체시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란 있다가 없어지는 사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시공과 생사를 초월해 있는 영적 실재(spiritual reality)로서의
존재를 말한다.

"존재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이 만물에게 관계하는 수단이다.
창조는 하나님이 만물에게 존재를 주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말씀, 루아흐(숨), 영은 하나님의 존재부여의 수단이다.
존재는 하나님의 활동무대며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며 또한 출구이다.
존재는 하나님과 피조물이 공동으로 지니고 있는 공통요소이다.
.........
우리의 생명은 죽게 마련이지만 우리의 존재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한 부분이며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란 하나님의 가장 독특한 현존(존재) 양식이다.
하나님 보기에는 (하나님 안에서는) 어느 것도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물이 죽은 것은 그 사물의 생명체(bios)가 죽은 것이지
존재(esse/being)가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은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모든 것은 존재를 지니는 만큼 하나님 안에 있고,
또한 하나님을 닮는다.
...............

모든 피조물은 존재를 지니고 있고, 존재인 하나님 안에 있다.
......................................................................................."

- 인용 : 에크하르트의 설교 "존재는 거룩하다" 에서
매튜 폭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김순현 역, 분도출판사, 2006, 131쪽 이하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존재(있음)란 하나님과 동의어이며
동시에 만물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만물이 존재의 표현 양식이며
또한 존재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만물 안에서 또는 만물을 통해서 존재 곧 하나님의 실재를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곧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다.
즉 하나님과 만물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인용 발췌 : <영성강좌> 류기종, 2013, 대한기독교서회

Deus est esse ipsum (하나님은 곧 존재 자체시다) - Thomas Aquinas

[레벨:18]눈꽃

2013.03.27 08:05:54

"신은 우주를 대상으로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ㅡ아인슈타인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다" ㅡ니체
이성을 통해 얼마간의 지혜는 가능하겠지만 일체의 사물들을 본다면 차라리 우연이라는 행복한 확신이 든다. 학자들이 다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세상은다시
'이성의 거미줄'을 빠져나간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얼굴을 찡그리지 말라. 과학자들이여! 이것은 화낼 일도 허무해 할 일도 아니다.
세상이 그만큼 무구하며 새로운 것들을 무한히 생성시킬 정도로 풍요로운 것 아닌가.
나는 신들이 주사위를 던지며 놀줄 안다는게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른다.ㅡ차라투스트라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세상을 만들 주사위를 던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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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03.27 23:14:55

재미있는 경구들입니다.
다들 어떤 절대적인 세계를 보고 있겠으나
주사위 놀이와 하나님의 창조가 어울리지 않는 건 분명합니다.
그의 창조는 우리의 눈에 신비와 우연으로 보이나 
그 깊은 차원에서는 그의 섭리가 작용하니까요. 
신비를 직면하되 그 너머에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마음을 두어야겠지요. 
내가 보기에 신비와 우연은 하나님의 자유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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