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9:11

조회 수 152 추천 수 0 2024.02.07 08:26:39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31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실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리라

 

하늘이 열린다.’라는 말은 가장 궁극적인 비밀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백마와 기수가 등장합니다. 말 이야기는 계 6장에 나왔습니다. 앞으로 돌아가서 그 대목을 참조하십시오. 그곳에는 네 가지 색깔의 말이 나옵니다.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입니다. 각각의 말을 탄 자는 이방 장군을 가리킵니다. 여기 계 19:11에 나오는 백마와 그 탄 자는 재림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본래 말은 성경에서 부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말은 발굽이 갈라지지 않았기에 유대인이 먹지 못한 부정한 동물입니다. 소와 양은 발굽이 갈라져서 깨끗한 동물입니다. 말은 주로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는 동물이기에 성경의 세계에서는,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계에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각오한 예루살렘 입성 당시에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셨다고 합니다. 요한이 굳이 백마를 등장시킨 이유는 예수 재림이 궁극적인 승리를 가리킨다고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백마를 탄 이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라고 합니다. ‘충신이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뜻의 충신(忠臣)인지, 충성과 신의라는 뜻의 충신(忠信)인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어로는 신실하다, 믿을만하다는 뜻의 Πιστς(피스토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말 성경의 충신은 충신(忠信)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요한은 재림의 주님께서는 충성스럽고 신실하며 진실한 분이기에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신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싸운다는 게 아니라 신적인 공의로움으로 세상을 통치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로 작동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별로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해도 어려운 형편이 좋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들이 인정받는 게 아니라 약삭빠른 사람이 인정받기도 합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하나님의 공의는 너무 거리가 멀게 보입니다. 요한의 저 메시지를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시련이 지금 당장 해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백마를 타고 오실 분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여기 일상에서 종말론적인 시각을 확보하느냐, 하는 게 요한의 메시지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험할 수 있는 요체입니다. 그걸 놓치면 이런 말씀은 공허해집니다. 이 말씀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종말론적인 시각을 단순히 문자로가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능력으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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