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포도주, 요한복음 묵상(18)

조회 수 6364 추천 수 0 2013.05.15 23:09:10

 

   요 2:1-11절에는 예수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일단 본문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 사실에 대한 명시적 언급은 없다. 그렇게 추정될 수 있을 뿐이다. 예수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한 다음에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연회장은 원래 물이었던 포도주를 맛보고 신랑을 칭찬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일반적인 기적은 예수의 어떤 행위가 병행된다. 기도를 한다거나 몸에 손을 댄다.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예수는 축사를 했다. 그런데 포도주 사건에서는 아무런 언행이 없었다. 물을 포도주로 바꿔 보겠다는 말씀도 없다. 단지 연회장의 반응만 나올 뿐이다. 이것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인가?

   공관복음서는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탄에게 받은 시험을 보도한다. 그중의 하나는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것을 거절한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신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요구는 거절하신 예수님이 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은 행하셨을까?


[레벨:5]블루군

2013.05.16 00:03:00

 목사님의 이번글을 읽어 보면 (보통의 신정통주의의 시각처럼) 포도주의 기적에 대해 단순한 설화로 전락시키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포도주 변환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포도주 변환 사건이 구원사역을 이루는데 필수적 요소였다고 생각하고, 그 기적에 대해서 필수적 요소로 인정을 합니다만 이 사건을 설화로 보더라도 그 의미는 떡과는 다른 큰 의미가 있다는 건 당연할텐데 왜 질문 형식을 남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관련한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나타내거나 안식의 실현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신명기 29장 5~6절을 보면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떡과 포도주(우리가 성찬으로 기념하는 것)이 금지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앞서 소개한 신명기 14장과 이어지는 내용인데요 약속의 땅에 있을 때에는 포도주가 허용되지만 광야에 있을 때에는 금지된다는 것입니다.

즉 포도주는 약속의 땅을 차지했을 때의 즐거움의 도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첫사역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이고, 십자가의 마지막이 포도주를 드신 것이겠죠.

마태복음 26장 29절을 보면 예수님이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라고 하시고 십자가의 마지막에 포도주를 드신 것은 종말(언약)의 성취가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8~30절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레벨:14]닥터케이

2013.05.16 02:37:43

(1) "설화" 라는 용어에 거부감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서신학에서 사용하는 설화라는 용어는 허구적 전설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한가지 단편적인 사건 (에피소드라고 해도 되겠습니다)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설화로 지칭되는  에피소드의 역사성이나 혹은 진실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가를 담고 있지 않는 단순한 신학 용어이니 너무 반감을 갖지는 마세요.

그리고, "보통의 신정통주의의 시각처럼 포도주의 기적에 대해 단순한 설화로 전락시키려는" 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신정통주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시도는 자유주의 내지는 역사적 예수 연구그룹에서 했던 것이지요. 보통의 신정통주의는 기적을 "단순한 설화로 전락" 시키지 않습니다. 물론, 일부의 경우에서는 그런 것처럼 보일때도 있기는 합니다만 - 그런 경우 조차도 내용을 파고 들어가보면 본문을 비하하거나 전락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만 - 어쨌든 그것이 신정통주의의 주된 흐름은 아닙니다.

(2) 십자가에서 신 포도주를 드신 것을 마태복음 26:29 의 성취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신 포도주는 새 포도주가 아니며 (말 그대로 시어서 식초가 된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시지도 않으셨고, 더구나 이때는 아직 부활의 영광을 입지도 않으신 시점으로서 아버지의 나라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시점이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마가복음 15장 23절에서는 몰약 탄 포도주를 "예수께서 받지 않으셨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몰약 탄 포도주는 안 마시고 신 포도주는 드셨다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만, 어쨌든 마태복음 26:29절에서 말씀하신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 은 십자가상에 달려 있던 시점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최종 완성이 이루어진 종말의 시점, 즉 어린 양의 혼인잔치 혹은 왕이 돌아와서 벌이는 잔치 등으로 비유되었던 그 시점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레벨:5]블루군

2013.05.16 03:15:28

 1. 저 역시 성경이 모두 역사적 사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어느정도는 설화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속과 관련된 사건들과 관련하여 진술된 내용들은 역사적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이 섞여 있는 설화로 보기보다는 역사적 사실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본문의 포도주 변환 사건 역시 저는 역사적 사실로 보아, (사실관계에 대한 진실성보다는 그 사건이 주는 의미에만 집중하고 그 역사적 사건성이 훼손 될 수 있는) 설화 취급하려는 인상에는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말씀하신대로 설화라는 표현은 에피소드를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각색된 내용이라는 의미이며, 에피소드를 그 자체로 보는 것보다는 1차례이상 가공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문의 내용이 종말론과 구원과 관련한 중대한 표상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는 사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내용이 부활과 마찬가지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따라서 각색도 가능한 더 넓은 범위인 설화라는 것으로 지위를 하락시키는 것이 위험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2. 제가 윗 글에서 주장한 것은 포도주는 종말론과 구원론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의 처음과 끝이 모두 포도주였다는 의미였구요.

 마태복음 26장 29절의 성취로 보아야 한다는 표현은 안 했지만 (주제가 그것이 아니었죠. 포도주의 의미에 집중하는 거였지)  그렇게 오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부분은 두개로 해석이 가능하죠.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한 이후 첫번째 포도주를 마신 사건을 성취로 볼 것이냐, 아니면 그것은 다른 의미로 해석 할 것이냐의 문제네요. 저의 경우는 26:29의 의미가 하나의 액면 그대로의 굳은 약속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 보기 때문에 닥터케이님의 시선과는 다르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점(제물로서 완성을 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될 길을 열어 주신 시점)이나 부활하신 시점(부활을 통해 성도들의 승리를 보증하신 시점) 중 하나의 시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점에 대해서 액면 그대로 구원의 최종완성 후 시점으로 보는 것이 저는 자연스러운지 모르겠네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오셨고 단지 완성되지 않은 것일 뿐인데 지금의 하나님의 나라를 부정하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레벨:14]닥터케이

2013.05.16 08:10:13

(1) 성서신학에서 말하는 "설화"는 말 그대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 라는 뜻이지, 그게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면 각색된 내용이냐 이런 의미는 담겨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설화라는 용어를 자꾸 전설과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는 많다고 생각합니다. 설화라는 단어를 다른 어휘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2) 이미 오신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포도주를 드시겠다는 의미라면 좀 곤란해지는게, 예수님이 공생애 생활을 하실때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마태 26장의 사건이 벌어지는 상황 자체가 이미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가운데 임재한 시점이므로 29절의 아버지의 나라라는 의미를 "도래하였으나 완성되지는 않은" 하나님의 나라로 규정하면 뭔가 문맥이 이상해진다는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지상에서 행하신 사역은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완료되었지만, 부활한 성자 하나님으로써의 사역은 최종심판과 영원한 왕국의 통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29절의 아버지의 나라라는 것은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점, 즉 성자 하나님의 사역이 모두 완성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 귀환한 왕의 큰 잔치 등으로 비유되는 시점, 바로 그 축제때 포도주를 마시겠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하는 뜻이었습니다.

[레벨:12]삼송

2013.05.17 11:45:25

닥터케이님글은배울점이많은것같습니다좋은글잘읽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3.05.16 11: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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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 두분 대화가 저에게 유익했습니다.
'신정통주의'에 대한 문제는
닥터케이 님의 설명이 옳습니다.
신정통주의는 교리사적으로 볼 때
일종의 개신교 스콜라주의라 할 17,18세기의 정통주의를 극복하고
종교개혁의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어요.
이들 운동이야말로 개신교의 주류요, 정통이지요.
블루군 님의 신학적 토양인(?)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을 잇는 게
바로 신정통주의랍니다.
신정통주의 선두주자인 칼 바르트 신학은
칼빈 신학과 다를 게 없지요.
우리나라의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전통과는 약간 다른 길을 걸어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지요.
많은 경우가 미국의 근본주의 영향인 거 같습니다.
블루군 님을 비판하는 거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과 예수님과는
좀 어울리지 않습니다. ㅎㅎ
제가 이 주제로 며칠 동안 매일 묵상에 쓸 건데,
미리 좀 말씀드리면 그겁니다.
예수님은 '베레 호모'이시답니다.
참된 인간이시지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실제로 물을 포도주가 되게 했다면
그의 인간성에 대한 부정이지요.
안 그런가요?
그의 신성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무한의 하나님이 유한의 인간이 되셨다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성육신 신앙에
물과 포도주 사건이 자칫 위배될 수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픽션을 썼다는 말도 아니구요.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을 말하고 싶었던 거지요.
어제부터 바람이 많이 부는군요.
그 바람은 곧 영인데,
이번 주일은 마침 성령강림주일이네요.
모두에게 바람(영)이 가득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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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13.05.17 07:53:00

저도 블루군님과 닥터케이님의 대화가 참 좋네요.
제게도 유익했습니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닥터케이님은 앞으로 한 꼭지 맡아서
글을 써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아이꼬, 이거 아부 아니고요^^)

[레벨:7]2C120

2013.05.17 11: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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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Q :
예수님은 '베레 호모'이시답니다.
   참된 인간이시지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실제로 물을 포도주가 되게 했다면
   그의 인간성에 대한 부정이지요.
   안 그런가요? "
  
A :
— 지당하신 말씀, 맞습니다, 맞구 말구요. ㅋ~
     ( “위 세 분 대화가 저에게 유익했습니다.”
        게시물 원글 필자께서는 앞으로도
        원글 필자 분의 입장이 분명한 문제는
        원글에서처럼 질문 형식으로
에둘러 놓지 마시고
    댓글에서처럼 아예 ‘돌직구’(?)로 원글 필자의 입장 표명을 해 주시는 게
    보기는 훨씬 "더" 좋겠사옵니다..ㅎㅎ
    짝짝짝.. 심심한 감사(?)의 박수를 보내 드리면서..  ^L^ )
      
   (PS. 어쩌다 보니 그만 "실수"(?)로 논거와 결론이 자중지란의 자가당착 내용이 되고 만, 세/두 분 대화에다가
           그런 와중에, 일부 헷갈리는 독해력들은 페이지 때깔(?)만 보고 좋아라 나서서는 
           "아부 아닌"(?) 고명으로까지 가세해 페이지 상차림을 금상첨화(?)로 "더" 빛내 주고 있으니
           그 댓글들 보기도 또한 
           "참 좋네요"  ^L^ )

[레벨:7]2C120

2013.05.18 15:5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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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정통주의’(?) 운운들 하셔서..
뭐 대개들 다 보셨겠지만 그래도 혹 어떤 분들을 위해서라면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운운 하는, 아래에 첨부해 두는 파일이나
아래에 링크 걸어 두는 내용도 혹 참고가 되실지 싶기도 하네요. 
http://www.kd77.kr/bbs/board.php?bo_table=tb12&wr_id=7
( 정용섭 목사님 또한 
  이미 이 '대구성서아카데미'의 다른 페이지인 '알림판 게시판'에서 
  정용섭 목사님 경우는(판넨베르크 신학 추종자로서 판넨베르크 신학과 함께)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유주의 신학'('신정통주의'가 아니라)을 하는 사람으로 지칭되고 있다고
  밝혀 발언해 주신 바도 있지요. 
  그러니
  물론 협의의 의미에서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의 일단으로 보는 견지들도 있거니와,
  용어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판넨베르크 신학 및 '정용섭 목사님 신학'(?)을
  일부 긍정적 의미에서 이해, 수용될 수도 있는 '신정통주의',
  '용어 사용에 있어 오해와 혼선의 소지가 그럭저럭 다분한 '신정통주의'로 지칭하는 건   
  좀 부적절한 표현 아닌가 싶은데요?
  정 목사님은 그 부분에 대해 뭐 "그건 그렇고.."하시며 흔쾌히 대충 지나치려 한 듯 보입니다 마는...   ^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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